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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수 없는 한국바둑에 꽂히다, 유럽 바둑광 둘

중앙일보 2014.03.28 00:30 종합 30면 지면보기
토마스 라츠(왼쪽)와 훌리오 마르티네스가 26일 서울 성동구 6형제바둑센터에서 대국을 벌이고 있다. 라츠는 한국 체류 중 거의 매일 이곳을 들러 가르침을 받을 고수를 기다렸다. 이날은 마르티네스가 맞수가 돼줬다. 마르티네스는 스페인어로 된 바둑 소개 사이트를 운영 중이다. [강정현 기자]


무엇인가에 제대로 ‘꽂히면’ 인생이 이처럼 즐겁구나. 25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인근에서 만난 훌리오 마르티네스(37), 토마스 라츠(33)를 보며 든 생각이다. 각각 스페인과 독일에서 온 이들이 꽂힌 대상은 한국 바둑이다.

한국기원 인근에 모여 대국
2년 전 한국 이주 프로그래머
휴가 때마다 서울 찾는 회사원
"바둑은 끝날 때까지 승부 몰라"



 마르티네스는 ‘정수(正手)대로 두는 한국 바둑 스타일’에 반해 2년 전 한국으로 이주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그는 처음엔 휴가를 내 한두 달씩 경기도 산본에 있는 외국인을 위한 바둑 연구소(BIBA)에서 연수를 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베를린 출신으로 보험사 대리점에서 일하는 라츠는 지난해부터 1년에 한 달씩 서울에 머물며 바둑을 둔다. 그들처럼 한국 바둑에 매료돼 한국기원 인근에 모이는 외국인들이 드물지 않다고 한다.



 마르티네스가 바둑을 시작한 건 2002년 바르셀로나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다. 인터넷으로 바둑을 접하고 바로 사랑에 빠졌다. 당시엔 정보가 부족했다. 영문으로 된 바둑책을 구해 읽다 보니 궁금증이 늘어갔다. “유럽에서 접할 수 있는 바둑책은 대부분 옛날 일본책 번역서입니다. 일본 유명 기사의 묘수에 대한 설명은 한국 프로들의 플레이와는 차이가 많더라고요.”



그는 한국 바둑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4년 전 직접 한국을 찾았다. 현재는 한국에서 프리랜서로 재택근무를 하며 바둑 소개 사이트(badukaires.com)를 운영 중이다. 최근 올린 글은 목진석 9단과 이세돌 9단이 맥심배에서 나눈 대화의 의미를 스페인어로 풀이한 것이었다. 그의 바둑 실력은 한국 아마 3단, 유럽 아마 1단. 그가 보는 한국 바둑의 매력은 정정당당함이다. “내게 좋은 수가 상대방에도 좋은 수가 될 수 있어요. 바둑은 인생과도 같아요. 체스의 전략은 체스에서만 쓸 수 있는 것과는 다르죠.”



 평범한 회사원인 라츠의 바둑 인연은 만화에서 시작했다. 일본 만화팬이었던 그는 11년 전 만화 ‘고스트 바둑왕’을 보다 호기심이 생겼다. 체스와 인터넷 게임도 좋아하지만 바둑의 매력은 치명적이었다. “돌을 잃어도 게임이 계속된다는 게 마음에 듭니다. 체스에선 비숍 하나만 뺏겨도 타격이 큰데, 바둑은 끝날 때까지 승부를 알 수 없어요.”



 라츠는 인터넷으로 바둑을 접한 지 3개월 만에 베를린의 한 기원에 나가 생애 첫 대국을 치렀다. 그 후 매주 수·토요일은 기원에 나가 바둑을 둔다. 가장 좋아하는 선수인 이세돌의 대국 영상을 스마트폰에 저장해 놓고 반복해서 감상한다.



 “베를린 기원에서 아마추어들끼리 모여 복기하는 것도 즐겁지만 우리가 하는 말이 맞는지 판단이 서지 않아 답답했다”는 게 라츠가 한국행을 택한 이유다. 그는 지난해 ‘한국기원’이라고 적힌 쪽지 한 장 달랑 들고 한국에 왔다. 한국기원 근처에 가면 강자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일반인은 한국기원 입장을 하지 못한다는 말에 실망했지만, 김성래 프로가 인근에서 운영하는 기원을 소개받아 체류기간 30일 중 25일간 출근 도장을 찍었다.



라츠는 올해도 한국을 찾아 숨은 고수들과 실력을 겨뤘다. 유럽 아마 1단인 그는 “많이 졌지만, 확실히 실력이 늘었다”고 말한다. 그는 “바둑에서 좋은 게임은 이긴 게임이 아니라 좋은 수가 많이 나와 많이 배운 게 많은 게임”이라고 했다. 그의 꿈은 올 여름 루마니아에서 열리는 유럽바둑챔피언십 참가하는 것, 그리고 내년 여름엔 다시 서울을 찾아 올해처럼 바둑에 푹 빠져 지내는 것이다.



글=전영선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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