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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 포커스] 극동 정착→강제 이주→복권→자유 … 무에서 유 창조한 그들

중앙일보 2014.03.28 00:03 6면
러시아 극동 연해주의 오사 시에서 에르네스트 김이 옛 러시아 전통에 따른 빵과 소금으로 환영받고 있다. 러시아에선 귀한 손님을 ‘빵과 소금’으로 맞는 전통이 있다. [사진 러시아 한인협회]


이고리 김은 은행업 분야에서 가장 성공한 러시아 비즈니스맨 중 한 명이다. 그의 뿌리는 고려인이다. 러시아판 ‘포브스(Forbes)’지 순위에서 그의 자산은 5억 달러(2011년)로 러시아 갑부 순위 200위 안에 든다. 지난 20년간 그는 30여 개 은행을 인수했다. 이고리는 ‘마음에 들어서’ 부실 자산들을 매입하는 것으로 빅비즈니스에 발을 디뎠다. 금세 은행업에 매료돼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고리 김의 눈부신 경력이 시작된 곳은 노보시비르스크 아카뎀고로도크. 이곳은 그의 운명과 뗄레야 뗄 수 없다. 최초의 파트너들은 그의 대학 친구들이었으며, 그를 ‘시브아카뎀방크’로 초빙한 이는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 원장 발렌틴 콥튜크였다. 이고리 김은 지난 20년간 러시아 사회에서 유명하고 비중 있는 인사가 된 수많은 고려인 중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고려인들이 하루아침에 러시아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 권리를 획득한 것은 아니다.

이주 150주년 맞은 러시아의 한인들
사할린 한인, 국적·이주 자유 없어
농업 종사하던 문맹 이민자에서
50년대 후 교육받은 도시인으로





한인의 러시아 역사는 1864년 시작됐다. 한국 농민 가족들이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 러시아 극동지역 땅에 정착한 해다. 이후 150년간 한인들은 극동 거주,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한인들이 일본에 협조할 것을 우려해 시행된 1937년의 중앙아시아 이주, 완전한 정치적 복권이란 네 개의 시기를 거쳤다.



사할린 주민 정모(60)씨는 “저는 사할린 섬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사할린 한인들에게는 당국의 공식 허가 없이 ‘본토’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지요. 군에서도 받아주지 않았고, 이주할 자유도 없었고, 소련 국적도 없었지요. 그래서 섬 밖으로 유학하러 가는 것이 모든 젊은이의 꿈이었죠. 저는 아카뎀고로도크에 대한 이야기를 줄곧 들어서 1976년에 노보시비르스크로 왔습니다”고 말했다.



스탈린의 억압을 받았던 한인들은 1950년대에 부분적으로 복권됐고, 러시아 내에서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이는 러시아 한인 사회 최초의 전환점이었다. 한인들은 농업에 종사했던 문맹 이민자들에서 교육받은 도시민층으로 탈바꿈했다. 한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소련의 현실에 발맞추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역사적인 조국 한국은 연결되지 않았고, 1990년대 초까지 고려인들에게 한반도는 닫힌 땅이었다. 그러니 한국어와 한국 생활풍습은 빠르게 잊히거나 변화했다. 예를 들어 고려인 음식으로 잘 알려진 ‘모르콥차’(당근으로 만든 고려인식 김치)는 김치의 필수 재료들이 없어 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의 대체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게 고려인의 현실이었다. 한국 문화가 원형은 변하지만 현실에 적응하듯 고려인들도 그런 방식으로 러시아 사회에 녹아들었다.



1980년대 말 고려인 역사에 두 번째 전환점이 찾아왔다. 소련 붕괴 이후 새롭게 탄생한 러시아의 시민들에게 국가정체성 위기가 일어났다. 더 이상 소련 사람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스스로를 러시아인이라 느끼지 못했다. 러시아 내 민족의 정체성 문제가 총체적 위기에 빠진 때였다. 동시에 러시아와 대한민국의 외교관계 문제가 대두됐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가 바로 새 고려인 역사의 출발점이었다. 이때부터 고려인들은 러시아 사회와의 협력뿐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와의 협력을 위한 전략을 수립해 오고 있다. 이는 고려인 디아스포라(이주)의 가장 중요한 진전과 변화를 가져왔다. 고려인들이 역사적 조국 한국과의 연결을 되찾게 된 때부터 20년간, 정확히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주요 사회적 제한은 1950년대에 철폐됐지만 소련 시대에 억압당한 고려인들의 최종적인 공식 복권은 1993년에야 시행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고려인들은 러시아 정부기관, 사업, 학문, 교육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시베리아 인터넷 매체의 자료에 따르면 벌써 몇 년 전부터 노보시비르스크시 최고 갑부를 기업가이자 은행가인 이고리 김이 차지하고 있다. 고려인 출신으로 성공한 또 한 명의 사업가 보리스 김은 러시아 및 CIS(독립국가연합) 지역 최대 결제 시스템 중 하나인 ‘키위(Qiwi)’ 은행의 공동 소유주이자 이사회 회장이다. 러시아 사회에서 입지를 강화한 고려인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과의 협력을 더욱 활발하게 도모하고 있다.



한인 이주 150년을 맞아 열린 사진 전시회 ‘리키러시아’의 사진. [사진 러시아한인협회]
“대학교를 졸업하고 저와 친구들은 초기 자금 2000달러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고려인식 조미료를 생산하고 있고, 우리 제품은 러시아 시장에서 입지를 굳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기업들과의 공동생산을 진지하게 계획하고 있어요.”(임모씨, 45세)



경제적 지위와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면서 고려인들은 러시아 정치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현재 노보시비르스크 주를 보면 주의회에 고려인 의원 두 명이 있고 고려인 부시장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만 해도 이렇습니다.”(황모씨, 83세)



고려인의 일상생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일상생활의 대표적인 상징 중 하나로 예전부터 쭉 자리매김해 온 것은 고려인 음식이다. 고려인 음식은 한인 사회가 이민족 환경에 적응한 예를 무엇보다도 잘 보여준다. 한국 전통음식은 새로운 거주지의 자연환경과 기후 특성의 영향을 받아 변모했다.



“가게에서 된장을 구할 수가 없어서 할머니가 직접 콩으로 된장을 담그시던 것을 기억해요. 집에서 나는 불쾌한 냄새 때문에 부끄럽기까지 했지요.”(최모씨, 61세)



소련의 고려인들이 민족성을 발현한 또 하나의 예는 가족적 질서였다. 고려인이 된다는 것은 한국 음식을 좋아하고, 부모님께 환갑 잔치를 해드리고, 어른을 공경하고, 뿌리에 속해 있다는 징표로 시집을 가도 성을 바꾸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족성은 개인과 가정을 넘지 못했다.



1990년대가 지나자 고려인들 사이에서 전통문화 복원·보존 요구가 일었다. 고려인들의 민족성이 공공영역으로 나왔다. 한국 음식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 되고 있다. 대도시나 중소 도시에서도 지금은 한국 식당과 간이 음식점을 볼 수 있다. 고려인 단체들은 설날·추석을 맞아 원하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한국 전통명절 행사를 연다. 고려인들은 다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크라스노야르스크에 사는 김모(49)씨는 “저는 벨로레츠크에서 살았는데 우리 아버지 말고는 고려인이 아무도 없었어요. 집에서는 러시아어만 썼고요. 아버지의 형제가 가끔 우리 집에 오면 낯선 말을 쓰시는 걸 들었죠. 지금 여기 크라스노야르스크에는 한국어 교육과정이 있고, 학생들이 60여 명 다니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과 가까워지고 부분적으로나마 ‘한국성’을 살리고 싶어함에도 고려인은 여전히 한국인이 아니라 러시아인이다.



임모(67)씨는 “한국인이 되려면 어렸을 때부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려인들은 전혀 다른 교육을 받고 자라서 한국에 가면 힘들 거예요. 자신을 바꾸고 적응해야만 하죠. 그래서 저는 무엇을 준다 해도 노보시비르스크를 세상 어느 도시와도 바꾸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본 기사는 [러시스카야 가제타(Rossyskaya Gazeta), 러시아]가 제작·발간합니다. 중앙일보는 배포만 담당합니다. 따라서 이 기사의 내용에 대한 모든 책임은 [러시스카야 가제타]에 있습니다. 또한 Russia포커스 웹사이트(http://russiafocus.co.kr)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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