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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 포커스] "서방 중요해도 큰 대가 치르며 협력할 필요 없어"

중앙일보 2014.03.28 00:03 5면


표도르 루키야노프
정치학자
외교국방 정책회의 의장
우크라이나 위기는 러시아 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다. 러시아는 1980년대 말부터 거의 4반세기 동안 지켜온 행동양식을 사실상 벗어났다. ‘국경 없는 세계와 유럽’을 꿈꾸던 시기부터 서방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유럽과 미국의 바람과 반대되는 행보를 취했을 때도 러시아는 서방과의 관계에 미칠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여지를 남겨 뒀다. 서방과의 관계는 러시아의 안보, 발전 및 복지를 위한 담보로 여겨져 왔다.

우크라이나 사태 전문가 기고
당장 현실은 냉혹하겠지만
비서방 국가로 눈 돌릴 기회
아시아·중국과 새 관계 기대



2014년 러시아는 이전과 다르게 행동했다. 서방 국가들의 요청, 촉구, 경고와 위협을 모두 무시하고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을 러시아에 편입시켰다. 러시아가 자기 생각대로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끝까지 가는 일은 없다는 것에 모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자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의 행동에 얼마나 근거가 있으며 입장이 얼마나 합리적인지와 관계없이 러시아를 처단하자는 데 뜻을 모으게 됐다.



러시아가 얻은 주된 교훈은 세계는 서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아가 세계는 실로 비균질적이고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어 권력 집중과 일방적 지배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개별적 접근이 필요한 새로운 강자들이 많이 등장해 서방과의 관계를 절대적 우선순위에 두고 세계 질서에 접근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러시아에 이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수 세기 동안 러시아는 서방 중심적 시각을 견지해 왔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아시아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에 대해 예전에도 이야기가 많이 나왔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얼마 전 이러한 전환을 21세기 러시아의 우선순위로 꼽았다. 서방이 러시아에 정치·경제적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하고, 냉전적 사고에 입각해 제한을 가하려고 한다면(예를 들어 투자·기술·금융·자금 접근을 제한하고 교류 축소, 시장 폐쇄, 결제시스템 정지 등) 러시아에 ‘서방 없는 세계’는 냉혹한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시아로의 방향전환은 비서방으로의 전환, 즉 더욱 광범위한 프로세스가 될 것이다. 금융 및 기술 면에서도 서방은 더 이상 독점자가 아니고 ‘제3세계’ 시장은 무한히 넓다.



서방이 아닌 다른 경제 중심지로의 방향전환은 꽤나 큰 충격이다. 첫째, 러시아는 비교적 최근까지 세계 정치의 변방, 주체라기보다 객체로 여겨져 왔던 국가들과 동등하고 완전한 협력을 추구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소련 시대에 우리는 수호자를 자처하고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미국과 싸웠다. 소련 붕괴 이후 처음에는 이들 나라를 사실상 무시했고, 그 후 잃었던 관계를 암중모색하며 회복시키려 노력해 왔다.



둘째, 개발도상국들에서 미국의 위치는 매우 확고하다. 그러므로 러시아와 거래하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권고’할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25~30년 전에 비하면 상황이 많이 달라져 지금은 러시아와의 거래를 금지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방의 압력수단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셋째, 현 상황에서 중국이 자연스러운 대안이 되고 있는데 그 이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러시아는 경제 면에서 중국에 한참 못 미치지만 정치적으론 긴밀히 연관돼 있다. 중국은 기꺼이 러시아를 지지하고(비공식적이긴 해도) 금융·경제적 지원을 할 준비가 돼 있지만 그 대가로 러시아의 중국 의존도가 급속히 높아지게 될 것이다. 게다가 양국의 이해관계가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러시아는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중국을 더욱 고려해야 할 것이다.



특히 러시아에 중요한 것은 새로운 입장들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전통적인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외에 다양한 국가와의 관계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세계는 서방 지배를 대체할 대안이 없다는 사실에 피로를 느끼고 있다. 러시아가 크림반도에서 행한 일들에 대한 공식 승인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국경 문제는 많은 이에게 너무나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를 봉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는 확실히 기대를 걸어도 좋다. 개발도상국들은 단체로 행동하는 것을 거부하고 각기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강대국들의 다툼을 이용하려 한다.



서방이 여전히 가장 강하고 영향력 있는 국제사회의 플레이어이며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무엇보다 과학·기술·교육 분야에서 그러하다. 또 러시아 및 전 세계를 사로잡는 유럽 문화의 매력은 어떤가. 러시아는 서방과 충돌하거나 서방으로부터 고립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무 조건에서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협력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21세기에 비서방 국가들과 견고한 관계를 구축하지 않고 성공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제재를 가한다면 감사해야 한다. 제재들은 오래전에 무르익은 방향의 재설정을 도울 것이다. 범세계적 측면에서 보면 러시아가 서방 중심의 좁은 시야를 버린다면 이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완전한 다극체제의 부상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표도르 루키야노프 정치학자·외교국방 정책회의 의장



본 기사는 [러시스카야 가제타(Rossyskaya Gazeta), 러시아]가 제작·발간합니다. 중앙일보는 배포만 담당합니다. 따라서 이 기사의 내용에 대한 모든 책임은 [러시스카야 가제타]에 있습니다. 또한 Russia포커스 웹사이트(http://russiafocus.co.kr)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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