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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보다 더 빛나지 말라" … 고전이 전하는 신선한 처세법

중앙일보 2014.03.27 00:04 14면 지면보기
스페인 국립원격교육대(UNED)가 소장한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초상화.



[좋은 삶, 좋은 책] ⑦ 발타사르 그라시안 『오라클』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말로 법의 보호가 필요하다. 착한 사람이야말로 냉혹한 현실을 배워야 한다. 착한 사람이 불행해지는 경우가 있지만 착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 순진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순진함을 없애려면 현실주의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현실주의 이론가로 정치학에 마키아벨리(1469~1527)가 있다면 ‘인생학’에는 발타사르 그라시안(1601~58)이 있다. 그라시안의 『오라클­-신중함의 기예(技藝)에 대한 핸드북』(1647년)은 마키아벨리를 연상시킨다. 미국 소설가 게일 고드윈은 『오라클』에 대해 “마키아벨리적이지만 양심의 가책이 담겼다”고 말했다. 그라시안이 마키아벨리를 비판하면서 이상적인 크리스천 지도자상을 제시한 『영웅(El h<00E9>roe)』(1637년)을 집필했다는 것을 상기하면 얄궂은 일이다.



『오라클』의 스페인어판(1647년)과 영문판(크리스토퍼 모러 번역,1992년) 표지.
 『오라클』에는 격언, 아포리즘 혹은 처세법이라 부를 수 있는 100~150단어로 돼 있는 300가지 말이 나온다. 한데 책 제목인 ‘오라클’이란 무엇인가. 신탁(神託), 조언·정보를 주는 길잡이, 전혀 오류가 없는 권위 있고 지혜로운 말 등을 의미한다. 그라시안은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 규칙을 발견해 ‘정치학의 아버지’가 됐다. 그라시안 또한 세상살이에 규칙이 있다고 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행운에는 규칙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을 우연에 맡기지 않는다.” 충분한 주의력, 감정의 통제, 자신에 대한 성찰, 신중함만 있으면 누구나 생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성공하고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그라시안의 관점이다.



 그라시안이 살던 시대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 국부 유출도 심각했다. 스페인은 전쟁을 치르는 데 돈을 물 쓰듯이 써버렸다. 중남미에서 가져온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영국· 네덜란드로 흘러들어갔다. 그라시안은 스페인을 ‘유럽의 서인도제도’라고 불렀다.



 암울한 시대가 배경이라 일부 내용은 ‘마키아벨리적’이라 할 만하다. 예컨대 이런 말들이 나온다. “생각을 지나치게 명료하게 표현하지 말라. 대부분의 사람은 그들이 이해하는 것을 하찮게 여기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숭배한다.” “영원히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말라. 오늘의 친구들은 마치 그들이 내일의 원수들인 것처럼 대하라.” “못생긴 얼굴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친구, 식구, 아는 사람들의 결점에도 익숙해져라.”



 그라시안은 예수회 소속의 성직자였으나 『오라클』에는 신(神)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하지만 그가 요구하는 것은 ‘나쁜 놈이 돼라’는 것은 아니다. 『오라클』은 어쩌면 위악(僞惡)을 통해 선을 지향하고 있다. 그라시안은 “항상 마치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고 말한다. 당하지 않으려면 그래야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 정신문화 전통에 나오는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감”, 즉 신독(愼獨)과 통한다. 냉혹한 현실 속에서 생존하는 길과 유교적 수양의 길은 이처럼 합류한다.



 『오라클』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특히 완벽함에 대한 강조다. “완벽함이란 양(量)이 아니라 질(質)의 문제”라며 그라시안은 “지나칠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하라. 그러나 당신이 달성한 완벽함을 남에게 보여줄 때에는 절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왜 절제가 필요할까.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존경받고 싶다면 당신의 깊이를 아무도 모르게 하라. 능력의 한계가 밝혀지면 존경심이 사라진다.” 남은 나를 모르게 해도 나는 남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라시안은 그 방법을 이렇게 제시한다. “어떤 사람의 재능을 판단하려면 그가 무엇을 열망하는지를 살펴보라. 위대한 재능을 만족시키는 것은 오로지 위대한 목표다.”



 『오라클』은 서구의 철학과 자기계발서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작가 라로슈푸코(1613~80)의 『잠언과 성찰』(1665년)은 『오라클』의 영향권에서 나왔다. 『오라클』을 “평생의 동반자”라고 규정한 쇼펜하우어(1788~1860)는 『오라클』을 직접 독일어로 번역했다. 니체(1844~1900)는 “도덕적 미묘함의 문제에 대해 이보다 더 세련되거나 더 복합적으로 서술한 책은 유럽에서 나온 적이 없다”고 극찬했다. 국내에서도 매니어층이 형성된 로버트 그린의 『권력의 법칙(The 48 Laws of Power)』에서 첫 번째 규칙은 “상관보다 더 밝게 빛나지 말라”인데, 이 말은 『오라클』에 나온다.



 『오라클』은 영미권에서 주기적으로 번역됐다. 『세속적 지혜의 기예(The Art of Worldly Wisdom)』라는 제목으로 나온 여덟 번째 영문판은 1992년 보스턴대 크리스토퍼 모러 교수가 번역했다. 스페인 제국의 쇠퇴가 미국의 쇠퇴 가능성과 오버랩됐기 때문인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라시안은 “최신의 것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고전에는 신서를 능가하는 새로움이 있다. 『오라클』에도 신선함이 있다. 그라시안은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는 방법을 알라. 행운은 기다리는 자에게 더 큰 상을 준다.” “한 줌의 신중함이 한 무더기 영리함보다 낫다.” 이런 말들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독자는 『세상을 여는 지혜의 황금열쇠』 등 여러 가지 제목으로 나온 『오라클』의 국문판을 읽어보시라.



Baltasar Gracian



발타사르 그라시안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한 마을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에 예수회에 입회했다. 귀족·장군들의 고해신부였으며 여러 예수회 대학에서 교수·학장으로 일했다. 글 때문에 예수회로부터 추방될 위기에 여러 번 처했다. 다른 저서로는 『정치가』(1640년), 『불평꾼』(1651~57년) 등이 있다.



김환영 기자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중남미학 석사학위와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일보 논설위원겸 심의실 위원, 단국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하루 10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아포리즘 행복 수업』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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