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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975.12.23 00:00 종합 1면 지면보기
한자의 「효」는 아비(고)와 아들을 뜻하는 글자의 합자이다. 그 상형을 보면 아들 위에 아버지가 있다. 이미 기역이 쇠한 아버지를 아들이 떠받들고 있는 모습은 무슨 암시가 있음직도 하다. 아버지의 의지를 본받아 아들이 그대로 행한다는 뜻이라는 해석도 있다.

서구 어 에는 꼭 「효」와 걸 맞는 독립어가 없는 것 같다. 영어에서는 「헌신」이라는 뜻을 가진 「디보션」(devotion)이라고도 한다. 다른 말로는 「필리얼·듀티」(filial duty)라고도 한다.

물론 이들은 「효」와는 거리가 있다. 「부모에 대한 사랑」에서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그 근원은 다르다. 「듀티」나 「디보션」은 모두 부담스럽고 무겁고 힘겨운 듯한 느낌은 준다.

「효」는 역시 동양인들만이 갖고있는 자연스러운 미덕의 하나인 것 같다.

「효」의 고전적인 모습은 가령 『심청전』에서 볼 수 있다. 오늘의 감각으로는 심청의 효행에 별로 동정이 가지 않을 것이나. 그러나 한가지 인상적인 것은 심청은 누구의 가르침을 받아 효행을 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매사를 자발적이고 당연한 일로 그렇게 했을 뿐이다.『효는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은연중에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천성이란 곧 인간의 깊은 심성이기도한 덕성을 의미한다. 「효」를 무슨 자선의 하나쯤으로 이해하려는 서구인의 「효」와는 바로 여기에 차이가 있다.

최근 삼성문화재단이 제정한 효행상의 대상수상자를 보면(작일 본지사회면소개)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은, 다만 의무로서의 효와는 어딘지 다르다. 며느리가 생모도 아닌 시 모를 마음 편하게 모시는 일은 쉽지 않다. 더구나 병석의 시 모인 경우는 더 이를데 없다. 그것은 의무감만의 표현일 수는 없다. 머리에서보다는 마음에서, 마음보다는 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천성이래야 할 것 같다.

『삼국사기』에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효녀 지은의 이야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몸이 된 어머니를 봉양하는 지은은 그 효행이 세상에 알려져 왕으로부터 응보가 내린다. 벼 5백섬과 집 한채. 효자 향덕과 성각도 그들의 효행을 표창 받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의 세정은 「효」를 단순한 덕목의 하나로 생각하려는 경향도 없지 않다. 부모에게 사랑을 요구할 수는 있지만, 자식에게 효도를 바랄 수는 없는 세상이라는 한탄도 듣는다. 부모가 자식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자식의 효행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이해의 타산도 있다. 과연 그럴까.

「효」를 덕목의 하나로 치부하려는 생각은 그런 타산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은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았다. 「효」는 천성이며, 그것은 덕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교훈 했다. 인간의 끊을 수 없는 유대의 근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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