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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처럼 또 쫓겨날까 … 크림의 타타르인 수난사

중앙일보 2014.03.20 02:30 종합 21면 지면보기
지난 16일 크림반도의 도시 벨로고르스크에서 시신 1구가 발견됐다. 테이프로 손이 감기고 고문 받은 흔적이 뚜렷했다. 39세의 건설노동자인 타타르인 레샤트 아메토프였다. 그는 3일 심페로폴에서 러시아 침공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석한 뒤 실종됐었다. 시위 현장을 촬영한 방송 영상에선 그가 3명의 괴한에게 끌려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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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주검으로 돌아오자 타타르인들은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다. 크림반도의 러시아 귀속이 불러올 후폭풍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다. 타타르 정치단체인 ‘크리미안 타타르 메즐리스’가 러시아 귀속을 묻는 주민투표 거부운동을 벌였던 터라, 곧 러시아 세력의 복수가 이뤄지리라는 공포다.



 크림반도에는 약 26만 명의 타타르인이 살고 있다. 인구의 12%다. 한때는 반도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땅을 빼앗기고, 타지를 떠돈 고난의 시간 끝에 고향에서 소수민족 신세가 됐다. 그리고 이들의 어두운 역사 뒤엔 늘 러시아가 있었다. 세르게이 악쇼노프 총리가 “민족적·종교적 갈등은 없고 허용하지도 않겠다”고 말했지만 타타르인들이 의심을 거두지 않는 것도 “악쇼노프의 배후에 러시아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는 가장 끔직했던 사건의 70주년이다. 1944년 5월 11일 크림반도에 거주하는 타타르인들에게 난데없는 이주 명령이 떨어졌다. 주어진 시간은 30분. 옷가지만 대충 챙긴 이들은 가축을 싣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타타르인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나치에 부역한 죄다. 적지 않은 타타르인이 소련의 ‘붉은 군대’에 복무했지만 징벌은 모든 타타르인에게 내려졌다. 20만 명이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황량한 동토로 쫓겨났다. 1970년대 대외 이미지를 위해 극소수 타타르인의 귀향이 허용됐지만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개혁·개방 정책 전까지 대다수 타타르인은 고향 땅을 밟을 수도 없었다. 대규모 귀향이 허용됐을 땐 이미 절반 이상이 굶주림과 추위로 숨진 뒤였다.



  두려움의 원인이 트라우마에만 있는 건 아니다. 크림반도가 격변에 휩싸인 순간부터 타타르인에 대한 탄압이 실제 벌어지고 있다. 2월 말 친러시아 세력이 세바스트폴의 정부청사를 점거했을 때도 수백 명의 타타르인은 청사 진입이 금지됐다. “스킨헤드가 타타르인들의 묘지를 파헤치고 있다”는 증언도 나온다.



 러시아에 거주하는 타타르인의 순탄치 않은 삶이 두려움을 키우기도 한다. 볼가-우랄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은 자체 언론 운영과 민족교육 실시, 고유 언어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러시아화’ 정책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종교 탄압도 우려 대상이다. 러시아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지만 이슬람은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경계 대상이 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18일 크림반도 합병을 공식화하는 의회 연설에서 “크림반도에서는 모든 종족과 문화가 존중받아야 한다”며 “우크라이나어·타타르어·러시아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겠다”고 밝혔다. 포용정책을 펼치겠다는 이야기다. 크림공화국 정부 관계자도 “타타르인에게 지역정부 대표권을 주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믿는 타타르인은 거의 없지만 이 때문에 고향을 떠나겠다는 이들도 없다. “크림반도는 우리의 고향”, 고향을 잃어본 민족만이 가질 수 있는 강한 신념 때문이다.



홍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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