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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통일의지, 권력의지

중앙일보 2014.03.17 00:56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수·당(隋·唐)의 대군을 번번이 격파한 고구려는 신라보다 군사력이 강했다. 드넓은 농토를 가진 백제는 신라보다 경제력이 앞섰다. 군사력·경제력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뒤진 신라가 무슨 힘으로 3국을 통일했는가. 흔히 지적되는 것이 나당(羅唐) 연합작전을 성공시킨 외교력이다. 김유신·관창 등 젊은 화랑들을 유능한 무사로 키워낸 교육도 큰 몫을 했다. 원효·의상 등 고승(高僧)들은 불심(佛心)으로 국민통합을 이루는 데 기여했다. 무엇이 이런 외교와 교육과 국민통합을 가능하게 했는가.



 경주 황룡사 터에 9층 목탑지(木塔址)가 남아 있다. 선덕여왕 때 건립된 9층탑은 신라 주변의 아홉 나라, 왜·당·오월(吳越)·탐라·백제·말갈·거란·여진·고구려를 가리킨다. 『삼국유사』 제3권의 탑상(塔像) 편에 따르면 장차 이들 나라가 신라에 조공을 바치게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9층탑은 신라인의 통일의지를 쌓아 올린 것이다.



 패망 전의 남부 베트남은 극도의 혼란 상태였다. 정부는 무능했고 관료들은 부패했다. 미군 철수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거리를 휩쓸었고, 승려들은 분신자살 행렬을 이어 갔다. 미군이 아침에 지원한 무기가 저녁이면 베트콩의 손에 넘어갔다. 통일의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북베트남은 달랐다. 국부 호찌민(胡志明)은 공산화 통일을 유훈(遺訓)으로 남겼다. 북베트남군은 휴전협정으로 미군이 철수한 지 2년여 만에 사이공을 함락시켰다. 북베트남의 통일의지는 확고했다.



 누가 독일의 통일이 갑자기 찾아왔다고 말하는가. 서독은 일찌감치 기본법 제23조에 동독을 독일연방에 가입시키는 흡수통일의 근거를 마련하고, 1961년부터 동독의 반인도적 범죄행위를 조사하는 잘츠기터 법무기록보존소를 운영했다. 경제 지원과 인권 문제를 연계시킨 헬싱키 협약을 충실히 지키면서 동독에 대한 경제 지원의 대가로 동독의 정치범과 그 가족 28만여 명을 서독으로 데려왔다. 78년에는 청소년들을 통일시대로 이끌어 가기 위한 ‘통일교육 기본지침’을 제정했다. 강력한 통일의지의 표현이었다.



 독일의 통일은 90년 10월 3일에 공식 선포됐지만 실은 89년 봄부터 지속된 동독 주민의 반정부시위와 그해 11월의 베를린장벽 붕괴에서 이미 시작됐다. 장벽을 넘은 동독 주민들은 동서독의 차이가 단지 경제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자유! 인간다운 삶의 원천인 자유는 공산체제하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것임을 그들은 절감했다. 동독 주민들은 마침내 호네커 공산정권을 무너뜨렸고, 그 결과는 이듬해의 통일조약 체결, 통일연방의회 총선거, 전승(戰勝) 4개국의 통일 승인으로 이어졌다. 독일 통일의 힘은 동서독 주민의 통일의지에서 나왔다.



 남북 예멘은 양측의 합의로 통일정부를 수립했지만 권력 배분을 둘러싼 갈등이 내전으로 번져 통일협정은 휴지 조각이 돼 버렸다. 결국 북예멘 군대가 남예멘을 점령해 흡수통일로 귀결됐는데, 남부 예멘에서는 다시 분리·독립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통일의지보다 권력의지가 앞선 탓이다.



 우리 헌법은 평화적 통일을 지향한다(헌법 제4조). 그러나 3대 세습이라는 희대의 권력의지를 품은 핵무장 세력과 함께 평화통일의 길을 열어 간다는 것은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 남북을 가른 휴전선은 남북한 주민의 가슴에 불길처럼 타오르는 통일의지로 뚫을 수 있다. 국내외 8000만 한민족이 통일의 열정을 뿜어내는 한, 중국이든 어떤 강대국이든 한반도의 운명을 멋대로 좌우하지 못한다. 우리의 안보와 외교 역량은 더욱 강화돼야 하지만 그보다 더 절실한 것은 우리 국민과 북한 주민의 통일의지다.



 자유보다 생존이 우선이라던 경제성장론자들이 북녘 동포의 굶주림보다 빼앗긴 자유에 더 분노하고, 빵보다 인권이 더 소중하다고 외치던 민주투사들이 북한 주민의 짓밟힌 인권에는 눈감은 채 경제 지원만 요구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통일의지가 확고하다면 있을 수 없는 위선이요, 속임수다. 우리는 인권과 생존권, 그 두 개의 가치로 북한 동포의 통일의지를 이끌어 내야 한다.



 유엔의 북한인권조사위원회는 북한 정권의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반인도적 범죄를 고발하면서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회의 북한인권법안은 어느 구석에 박혀 있는지 행방조차 묘연하다. 젊은 세대의 통일교육은 꿈도 꾸지 못한다. 정권 투쟁과 이념 갈등 때문이다. 남북 통일은커녕 남남 통일도 아득하기만 하다. 원대한 통일의지는 찾을 수 없고 눈앞의 권력의지만 드셀 따름이다. 통일의 가장 큰 장애물은 북핵도 아니고 외세도 아니다. 오직 통일의지의 결핍이다.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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