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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행복이든 불행이든 상관없어

중앙일보 2014.03.14 00:05 종합 28면 지면보기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처음엔 이 만화가 싫었다. ‘웃음과 눈물이 공존한다’던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가난한 부부의 일상을 담은 4컷짜리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이 만화의 웃음 포인트는 주로 밥상을 뒤엎는 남편의 모습이다. 직업은 없고, 경마장이나 빠찡꼬에 드나들며 술과 노름을 즐기는 백수건달 이사오. 특기는 ‘욱하기’다. 밥이 맛없다고 맥주가 미지근하다고 밥상을 뒤엎고, 마작을 하다 불리해지면 판을 뒤엎고, 경찰의 태도가 맘에 안 든다며 경찰서 책상을 엎어버린다.



 부인 유키에는 고단하다. 하루 종일 식당에서 일해 번 돈은 남편의 노름으로 날아간다. 집에서는 식사준비부터 남편의 재떨이 대령까지 모두 그녀의 몫이다. 그런데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테이블을 뒤엎을 때도 내가 상처 입지 않도록 신경 써 주는” 남편이라 좋다 한다. ‘폭력적인 남편과 살며 행복하다고 말하는 여자’를 그린 이 만화는 1996년 일본에서 출간되었을 때부터 논쟁을 일으켰다. “짜증난다”에서부터 “마조히스트(masochist)가 아니고서야 좋아할 수 있겠느냐”는 악평에도 시달렸다. 하지만 이런 논란 속에서 만화는 크게 화제가 됐고, 2007년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만화 『자학의 시(詩)』 1권 표지. [사진 세미콜론]
 주인공 유키에의 이야기는 2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남편 못지않게 ‘밥상 뒤집기’의 대가였던 아버지와 단둘이 보낸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에게는 ‘드라큘라’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학교에서는 ‘존재감 제로’였던 학창 시절이 슬프지만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아침저녁으로 아르바이트에 시달리며 “당장이라도 인생에 지고 말 것 같다”라고 생각하던 소녀. 이런 유키에가 단 하나의 친구를 만나 따뜻함을 배워가는 과정, 그리고 이사오라는 형편없지만 ‘내 편’인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는 눈물겹다. 유키에가 왜 이런 ‘자학의 시’를 쓰고 있는지 조금쯤 알 것 같아진다.



 때로 마음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때면 이 만화를 꺼내 든다. 최근 인생의 한 지점에서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결론 내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도 자꾸 이 만화가 생각났다. 그 암흑이 어떤 것인지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왜 조금 더 힘을 내 보지 않았느냐 나무랄 자격도 없다. 단지 만화의 마지막, 유키에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에게 쓴 이 편지를 떠올린다. “엄마, 이젠 인생을 두 번 다시 행복이냐 불행이냐로 나누지 않을 겁니다. 인생에는 그저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단지 인생의 엄숙한 의미를 음미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용기가 생깁니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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