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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사회적 테러나 다름없는 보이스피싱

중앙일보 2014.03.05 00:42 종합 29면 지면보기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이상화
사회부문 기자
보이스피싱 피해 사례 취재를 위해 지난달 피해자 김모(40·여)씨를 만나기로 했다. 당초 약속을 잡은 취재팀의 후배에게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겼다. 어쩔 수 없이 기자는 “후배가 사정이 생겨 제가 대신 만나려 한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김씨는 화난 목소리로 약속을 취소하자고 했다.



“항상 이런 식이죠. 보이스피싱 범인들도 사정이 있다며 사람을 바꾸더라고.”(김씨)



  “어제 이집트 폭탄테러 유가족 취재 때문에 갑자기 바뀐 거예요.”(기자)



  “불안해서 만나기 힘들 것 같아요. 또 사기당할지도 모르고.”(김씨)



  “저희는 선생님 같은 분들이 생기지 않도록 취재하려는 거예요.”(기자)



  몇 차례 설득 끝에 당초 약속보다 한 시간이 지난 뒤 김씨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김씨는 “명함부터 한 장 주실 수 있을까요”라며 여전히 불안한 눈초리로 기자를 살펴봤다.



 김씨는 보이스피싱을 당한 지 1년이 다 돼 가지만 아직도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지난해 4월 저축은행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에 걸려들었다. 범인은 대출을 해주겠다며 30여 차례에 걸쳐 선이자·보증료 등의 명목으로 9300만원을 가로챘다. 여러 명이 은행직원이라며 번갈아 전화를 걸었다. 사기인 줄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요즘도 밤마다 보이스피싱 목소리가 떠오른다. 무엇보다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됐다. 본지가 취재한 보이스피싱 피해자 15명은 대부분 김씨처럼 깊은 불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박모(40)씨는 지난달 21일 납치한 남편의 손가락을 자르겠다며 돈을 요구한 범인에게 1200만원을 보냈다. 경찰에 신고하니 “수사는 하겠지만 잡기는 힘들 것”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그가 가입한 보이스피싱 피해자 카페의 회원들도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고 충고했다.



 피해자들은 어렵게 잡은 보이스피싱 범죄자들마저 벌금 등 가벼운 처벌을 받고 풀려나는 것을 보고 더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꼭 금전적 손해를 보지 않았더라도 보이스피싱으로 인한 사회적 불신과 피해가 확산되고 있다. 취재팀의 한 기자는 보이스피싱 취재 도중 “○○○업체인데 인터넷 요금이 밀렸다”는 전화를 받았다. 보이스피싱이라고 생각해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나중에 진짜 집 인터넷이 끊겨 곤란을 겪었다.



 보이스피싱이나 스미싱 같은 범죄는 정보사회의 근간을 훼손시키는 사회악이다.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범행한다는 점에서 단순 사기범이라기보다 테러범에 가깝다. 처벌을 강화하고 예방책을 마련하는 데 정부와 국회·기업이 힘을 모아야 한다. 전화·e메일·문자를 사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온라인 기반의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겠는가.



이상화 사회부문 기자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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