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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반도 손에 쥔 푸틴 … 나토 마지노선은 동부 국경

중앙일보 2014.03.04 00:35 종합 16면 지면보기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경우 막대한 정치적·경제적 고립을 초래할 수 있다.”(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1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서방·러시아 전면전 가능성은
'한 방' 없는 미국?EU 말로만 강경
오바마 아시아 중시 외교도 시험대

 “유엔 헌장을 위반하는 것이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재검토할 것이다.”(아네르스 포그 라스무센 나토 사무총장, 2일 긴급 성명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사실상 손아귀에 넣은 뒤 미국 등 서방이 보인 반응이다. 말은 강경하지만 ‘한 방’이 없다. 심페로폴과 세바스토폴 등 크림반도 주요 도시에 펄럭이는 러시아 국기만큼 강력하지 않다. 러시아를 주요 8개국(G8) 모임에서 뺄 수 있다고 했지만 푸틴은 이미 2012년 오바마에 대한 불만 표시로 G8 정상회의에 불참한 바 있다. 그러는 사이 크림반도의 우크라이나군은 속속 러시아에 투항 중이다. 사실상 크림반도를 되찾을 수 있는 물리적 카드는 없다.



 더 큰 문제는 러시아의 도발이 다른 지역까지 확대될 경우다. 푸틴 대통령은 이미 선수를 쳤다. 지난 1일(현지시간) 오바마 대통령과 90분간 전화통화를 하면서 “우크라이나 동부와 크림반도에 폭력사태가 확산될 경우 러시아는 자국 이익을 보호하고 이 지역 러시아권 인구를 지키기 위한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 지지기반인 이들 지역에선 이미 친러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동부권 소요 진압에 나선다면 이를 빌미로 개입하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즉 드네프르강 동쪽에 군사 개입을 한다면 이는 사실상 내전을 뜻한다. 공업과 석탄 생산 중심지인 동부와 남부 크림반도까지 러시아에 뺏긴다면 우크라이나는 내륙 빈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1994년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겨주는 대신 우크라이나의 영토 주권과 안보를 보장받은 ‘부다페스트 양해각서’가 휴지조각이 된다. 이번 사태 발발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는 당시 양해각서 보증국인 미국과 영국 등에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확보해 줄 것을 요청하겠다는 방침이다.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사태 초기부터 2008년 조지아 사태와 달리 직접적인 개전 가능성은 낮게 봤다. 우선 우크라이나 채권이 대거 물린 러시아 은행들의 이해관계가 있다. 예비군 100만 명을 포함한 우크라이나의 군사 규모와 실전 경험(이라크전 등)도 무시할 수 없다. 내전으로 난민이 대거 발생하면 접경국인 러시아도 피해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나토와의 전면전을 감수해야 한다는 위험이 있다.



 형식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나토 회원국이 아니다. 2008년 친서방파였던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은 나토 가입을 추진했다가 러시아의 격분을 샀다. 당시 2기 집권 중이던 푸틴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는 독립국가가 아니다”고 호통을 쳤다고 전해진다. 우크라이나는 2010년 2월 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나토 가입 계획을 철회했다.



 1949년 창설 후 계속 ‘동진’해 온 나토는 90년대 동구권 붕괴와 함께 동유럽 국가도 끌어들여 현재 28개국이 가입해 있다. 우크라이나의 서쪽 접경 4개국, 즉 폴란드·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가 나토 회원국이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을 때 나토가 수수방관한다면 ‘안보우산’을 미끼로 발트해 연안국들을 회유해 온 나토의 패권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이미 오바마 대통령은 시리아 사태 때 자신이 설정한 화학무기 ‘레드라인(금지선)’을 사실상 외면함으로써 신뢰를 잃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3일자 사설에서 “오바마와 서방이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푸틴이 서방의 경고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전례를 되풀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역으로 이는 미국 등 서방이 사력을 다해 외교적 해결에 주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리아·이란 사태 등 각종 국제현안에서 그 어느 때보다 러시아의 협조를 필요로 하는 미국은 최대한 직접적 충돌을 피하려 한다. 조지 W 부시 정부에서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니컬러스 번스는 3일 파이낸셜타임스에 “이번 사태는 오바마 재임기간을 통틀어 가장 심각한 위협”이라며 “선택은 단 하나, 외교적 해결뿐”이라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오바마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내부 비판도 거세지고 있다. AP통신은 3일 “미 상원에서 폴란드와 체코에 배치된 미사일 방어망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 공화당 차기 대권주자로 주목받는 마코 루비오 의원 등은 2009년 폴란드와 체코에 장거리 요격미사일과 레이더를 배치하려다 포기하기로 했던 계획을 되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번 사태가 미국의 ‘아시아 중시 정책(Pivot to Asia)’을 재고하게 만들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워싱턴에 본부를 둔 싱크탱크 대서양위원회의 데이먼 윌슨 부회장은 “미국이 유럽의 안정과 안보를 확고한 것으로 간주했던 게 환상으로 드러나고 있다”며 “푸틴에 대한 견제가 이뤄지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이 중동과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군사를 철수해 재배치하면서 힘의 공백이 생긴 것이 지역 불안을 초래한 선례도 들었다. AP통신은 “이번 위기가 오바마의 안보정책에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다”며 러시아 견제를 위해 미국이 아시아 중시 정책을 포기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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