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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민주주의, 안녕들 하십니까

중앙일보 2014.03.04 00:35 종합 31면 지면보기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권좌에서 쫓겨난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본인은 지금도 현직이라고 우기고 있음)이 야반도주를 하면서도 전 세계 동업자들에게 한 가지 교훈은 확실하게 남겼다. 아무리 급해도 기밀문서를 물속에 버려둔 채 달아나선 안 된다는 교훈 말이다. 시위대는 잠수부까지 동원해 대통령 사저에 딸린 인공호수에서 약 2만 쪽에 달하는 서류를 건져올렸다.



 물기를 말린 기밀문서가 한 장 한 장 인터넷 전용 사이트(야누코비치리크스)에 공개될 때마다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었을 그의 비리와 치부들이 맨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이권에 개입해 엄청난 뒷돈을 챙긴 일이며 정부(情婦)에게 값비싼 선물을 사준 일, 시위 진압 목적으로 저격수를 배치한 일 등 그동안 유언비어로 떠돌던 온갖 의혹이 하나 둘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아무리 경황이 없어도 기밀문서는 반드시 소각하거나 파쇄할 것! 야누코비치의 교훈이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신호(3월 1일자)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드라마틱하게 전개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배경에는 역사·문화·종족적 원인에 경제·지정학적 원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한 가지 잣대로 바라볼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했더라면 8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유혈사태도, 대통령이 허겁지겁 줄행랑치는 일도, 외세의 개입으로 전쟁 위기로까지 사태가 확대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고장 난 민주주의가 이번 사태의 발단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3년 전, 이집트 국민은 호스니 무바라크의 30년 철권통치를 자신들 힘으로 무너뜨렸다는 자부심과 환희 속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 부풀어 있었다. 이슬람권 전체로 아랍의 봄바람이 확산될 수 있다는 기대도 높았다. 하지만 웬걸! 이집트의 민주화 실험은 일장춘몽(一場春夢),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장군들 좋은 일만 시켜준 꼴이 됐다.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도록 하는 데 비하면 독재자를 권좌에서 몰아내는 건 차라리 쉬운 일이라는 걸 지금 이집트 사람들은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10년 간격으로 두 번씩이나 시민혁명을 경험한 우크라이나 사람들도 똑같은 심정 아닐까.



 만개(滿開)할 것만 같았던 민주주의가 21세기 들어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민주화 실험은 곳곳에서 역풍을 만나 좌초하고 있고, 민주주의 대열에 합류했다고 믿었던 나라들에서도 역주행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권위주의와 부패는 집권 기간에 비례한다는 걸 증명하고 있는 터키가 그렇고, 나라가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져 무한대립 중인 태국이 그렇다. 미국의 비영리인권단체인 프리덤 하우스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기본인 시민적 자유와 정치적 권리는 전 세계적으로 8년 연속 하락세를 기록했다. 민주주의의 외피만 걸쳤지 사실은 민주주의라고 하기 힘든 나라들도 점점 늘고 있다. 그 결과 전 세계 195개국의 절반이 훨씬 넘는 107개국이 내놓고 독재를 하고 있거나 무늬만 민주주의인 나라들이다.



 성숙한 민주주의가 정착된 줄 알았던 선진국들에서도 민주주의는 심각한 기능부전 증세를 드러내고 있다. 눈앞의 단기성과와 표에 급급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 정치권에 대한 환멸과 냉소로 이어지고 있다. 국리민복(國利民福)보다 당파적 이익을 앞세우는 정치권의 극심한 정쟁 탓에 국정운영이 차질을 빚고, 미래에 관한 중요한 의사결정이 무한정 지연되는 ‘그리드록(gridlock·정치적 교착 상태)’이 일상화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롤모델로 여겨지던 미국이 바로 그런 꼴이다. 그 틈새를 비집고 중국은 일당독재와 능력주의가 결합된 중국식 거버넌스가 민주주의의 대안이라며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민주주의는 섬세하고 연약한 식물이다. 씨를 뿌린다고 아무 데서나 쑥쑥 자라지 않는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와 다원주의는 민주주의의 최소조건에 불과하다. 조금만 방심해도 민주주의는 상처를 입고, 쉽게 시든다. 시민적 권리를 보호하고,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도록 끊임없이 보살피고, 가꿔야 한다. 환경에 맞게 변화시키고, 업그레이드하는 노력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



 이코노미스트 산하 연구소인 EIU가 167개국을 대상으로 평가한 2012년 민주주의 지수에서 한국은 10점 만점에 8.13점(8점 이상이면 완전한 민주주의)으로 20위를 기록했다. 미국(21위)이나 일본(23위)보다도 높다. 이만하면 됐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선출된 지도자가 ‘승자독식’의 유혹에 빠질 때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경고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계속 안녕할까. 그것이 문제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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