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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때 수백만 아사 … 러시아계 집단이주로 채워

중앙일보 2014.03.03 00:55 종합 16면 지면보기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외세가 개입되지 않은 시기를 찾아보긴 힘들다.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은 우크라이나를 놓고 파워게임을 멈추지 않았다. 한반도의 2.7배에 달하는 국토의 절반 이상이 경작 가능한 땅이고 이 중 60%가 비옥한 흑토이기 때문이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며 독립의 기쁨을 맛봤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서 끼여 분열을 겪었다. 도돌이표를 찍듯 수세기 동안 반복돼 온 비운의 역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한 지붕 두 민족 갈등의 뿌리
수백 년간 러시아·폴란드 먹잇감
2차 대전 땐 나치·소련 동시 징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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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는 9세기 슬라브 국가로 세워졌다. 12세기 전까지는 강대국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후 쇠퇴해 14세기엔 거의 모든 영토를 금장한국(몽골)·폴란드·리투아니아 세 왕국이 나눠 지배했다. 17세기에 이르러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 간 전쟁으로 우크라이나는 다시 한번 나눠진다. 드네프르 강을 기준으로 동쪽은 러시아의 차르 소유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우크라이나의 동부는 ‘좌안’으로 불리며 공업과 석탄 생산 중심지로 변모한다. 소련 시절을 거치면서 좌안은 중공업 지역으로 발전했고 현재까지 친러시아 성향이 지배적이다. 같은 시기 드네프르 강 서쪽, ‘우안’은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국이 무너지자 우크라이나는 처음으로 독립을 꿈꾼다. 극심한 내전 끝에 가까스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세우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919년 소련 군대가 우크라이나 영토에 주둔하면서 인민공화국은 무너졌다.



 1920년에는 폴란드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면서 현재의 우크라이나 서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차지했다. 그러나 1938년 스탈린의 폴란드 침공으로 다시 소련이 지배하게 된다. 소련은 우크라이나 언어와 문화에 적대적인 정책을 펼쳤다. 또 1932~33년 스탈린의 집단농장 정책 등으로 수백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죽어간 자리를 소련 지역 이주민과 러시아인들로 채워 넣었다. 반러 감정을 지닌 우크라이나인들과 러시아를 모국으로 여기는 집단이 한 나라에 살게 된 배경이다.



 우크라이나는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가장 많이 본 나라이기도 하다. 키예프 전투, 하리코프 전투, 세바스토폴 전투 등 2차대전 중 가장 참혹한 전투로 꼽히는 전투들이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졌다. 나치 독일과 소련은 서로 우크라이나인을 징집해 전쟁터로 내몰았다. 소련군 전사자 870만 명 가운데 140만 명이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집계가 있을 정도다.



 2차대전을 겪으면서 독일과 소련 양쪽 모두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게릴라들이 활동을 시작해 50년대 초반까지 전투를 계속했다.



 2차대전 이후 우크라이나에 대한 소련의 강경책은 완화됐 다. 54년 소련은 자신들이 관할하던 크림반도를 ‘우정의 선물’로 우크라이나에 관리하도록 했다. 1783년 이슬람으로부터 크림반도를 빼앗아 귀속한 러시아는 200여 년간 지역을 지배해왔다. 특히 현재 러시아 흑해 함대가 주둔하는 세바스토폴은 크림전쟁 당시 러시아군이 11개월간 연합군의 봉쇄를 견뎌낸 곳이다. 크림전쟁을 ‘도덕적으론 승리한 전쟁’으로 기억하는 러시아인들이 이 지역에 각별한 애착을 보이는 이유다.



전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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