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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당쟁 기간 중 140명 처형 … 日은 텐구당 난 때만 352명 참수

중앙선데이 2014.03.02 00:41 364호 10면 지면보기
이건창의 『당의통략』. 1575년(선조 8)부터 1755년(영조 31)까지 180년의 붕당사를 정리했다. 양반 중심 정치가 극복돼야 한다는 관점에서 붕당을 비판했는데 일본의 식민사학자 시데하라가 이를 당쟁 폐해론을 주장하는 근거로 교묘하게 악용했다.
일제는 조선시대 붕당사를 왜곡하는 데 골몰했다. 민족성, 더러운 피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처참함을 강조했다. 오다 쇼고 같은 이를 비롯해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조선왕조 후기에는 당쟁으로 살육행위가 격전처럼 전개됐고 참극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 점은 이건창이 『당의통략』에서 붕당 폐해의 원인을 8개로 지적하며 그 하나로 형벌과 옥살이 벌의 지나친 엄함을 꼽은 것과 유사해 보인다.

『당의통략』 분석으로 본 일제 ‘당쟁 처참론’의 허구

 시데하라가 ‘조선인 스스로가 고백한 글’이란 식으로 악용한 서적이다. 그런데 실제로 처참했나. 『당의통략』을 직접 분석한 두 연구가 있다.

 경남대 김종덕 교수의 1981년 논문 ‘이조당쟁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당의통략』의 갈등분석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사형당한 이는 19명이다. 전체 처벌은 128건이며 사형을 제외하면 귀양 57건, 파면 25건, 관직삭탈 10건, 책망 7건, 외직 5건, 국문 3건으로 분류했다. 그리 잔인해 보이지는 않는다.

 건국대 신복룡 명예교수도 1988년 『당의통략』의 사망자를 연구했다. 김 교수의 조사결과와는 다르다. 선조 때 21명, 인조 2명, 효종 7명, 숙종 38명, 경종 38명, 영조 34명으로 모두 140명이 죽었다. 이 중 역모자 63명, 임금을 속인 자 2명, 반정으로 죽은 자 9명, 장희빈 사건으로 죽은 자가 13명이다. 신 교수는 “순수 당쟁으로 죽은 이는 79명”이라고 했다.

 신 교수 분석에 따르면 사망자도 당쟁보다 왕실 전복과 관련돼 많았다. 선조 때는 ‘정여립의 난’이 있었다. 숙종 때는 임금을 바꾸려 한 시도 때문에 발생한 ‘경신대출척’, 경종 때는 ‘임금 암살 시도’ 사건인 목호룡의 고변이 있었고, 영조 때는 목호룡의 고변이 거짓으로 탄로나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인명은 중요하다. 그러나 최대 140명으로 잡더라도 180년에 걸친 사형의 수를 처참하다고 본 것은 과장이 아닐까.

 서유럽 정치사는 훨씬 더 참혹하다. 프랑스 혁명 때인 1792년 8월 10일 하루 1300명이 처형됐다. 1795년 7월 21일엔 하루 만에 왕당파 718명이 처형됐다. 파리 코뮌 기간 중 ‘피의 주간’인 1871년 5월 21~28일엔 2만5000명이 피살됐다. 제정러시아의 ‘피의 일요일’인 1905년 1월 22일 하루에 500여 명이 피살됐다(이상 신복룡 『한국정치사』). 신 교수는 “조선의 국법은 무분별한 참극을 허용치 않아 영국의 청교도 혁명이나 프랑스 대혁명에서 같은 대량 학살이 없었다”고 지적한다.

 일본도 잔혹성엔 유럽을 뺨친다. 에도시대 막부 말기인 1864년 5월 2일 미토번(水戶藩)의 개화파 중 과격파가 반란을 일으킨다. 막부에 대해 쇄국론의 기치를 내걸고 거병한 것이다. ‘텐구당(天狗黨)의 난(1864. 5~1865. 1)’이다. 막부의 미·일 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반발하는 일왕과 막부의 대립, 번 내 보수파와 개화파의 대립 등 파벌에 얽혀 발생했다. 일제 식민지 학자들이 ‘당쟁’이라 부르는 조선의 붕당 논쟁의 성격임에도 사무라이의 나라답게 칼의 대결이 벌어졌고 피바람이 불었다. 난은 실패로 끝났다. 정리를 담당한 다누마 오키다카(田沼意尊)의 막부군은 사정없었다. 주요 인물은 그냥 감금했지만 나머지는 수갑·족쇄를 채워 비좁은 청어 창고에 짐짝처럼 밀어넣었다. 하루에 주먹밥 하나와 더운 물 한 잔. 사망자가 속출했다. 창고에서 죽은 사람만 20명 이상이었다. 난이 실패로 끝나자 828명의 투항자 중 352명을 참수했다. 일본이 과거사를 돌아본다면 한국의 당쟁만 처참했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식민사학자들은 당의(당쟁) 기간도 길게 잡으려고 애썼다. 그들의 주장은 ▶230년 설(선조 8년 1575년~영조 말기) ▶290년~330년 설(오다 쇼고 주장) ▶410년 설(시데하라 주장)로 분류된다. 신 교수는 “시데하라는 당쟁의 참혹성을 과장하려고 사화를 포함시켰다. 그러나 사화는 당쟁과 다르다”며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추방되고 서인이 득세한 1725년까지 50년 정도를 당쟁 기간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고 강주진 전 중앙대 교수도 『이조당쟁사연구』에서 ‘당쟁은 경신대출척부터 탕평책이 정착된 1772년(영조48년)까지 92년 정도’라는 입장이다.

 그런데 일제의 어용 한국 지식인이 기간을 더 늘렸다. ‘개벽’ 주간이었던 차상찬은 『사화와 당쟁』에서 조선개국부터 멸망(1392~1910)까지 520년을 당쟁 기간으로 봤다. 조선조 내내 싸웠다는 것이다. 홍승구(홍목춘)는 1934년 11월 ‘개벽’의 복간 창간호에서 한술 더 떠 고려 초~조선조 말까지 900년간으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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