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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제1 목표는 물가 아닌 경제 안정

중앙선데이 2014.03.02 00:59 364호 14면 지면보기
호민관은 고대 로마의 관직이었다. 귀족에 맞서 평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임무였다. 이성태 전 총재는 재임 시절 한국은행을 호민관에 비유하곤 했다. 당시엔 “물가를 안정시켜야 서민 삶이 나아지기 때문”이라고 해석됐다. 26일 한은 강남본부 고문실에서 만난 그는 “물가 안정뿐 아니라 한은의 모든 업무가 서민 삶이 흔들리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한은의 제 1 목표는 물가 안정이 아니라 언제나 경제 안정이었다. 재임 중 붙은 ‘인플레 파이터’라는 별명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성태 전 총재 인터뷰

-세계적으로 중앙은행장 역할이 확대되는 추세다.
“한은은 더 이상 물가 안정에만 매달려서는 안 되고 금융 안정과 경제 성장도 이끌어야 한다, 가계부채나 부동산 문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얘기가 나오는데 한은의 업무를 잘못 이해한 거다. 예전부터 물가 안정이 레토릭(rhetoric·수사학)상에선 한은의 업무 목표인 것처럼 묘사됐지만 그건 정치적 수사였을 뿐이다. 언제나 한은은 경제 전체의 안정을 목표로 하고 통화 정책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수사란 건 무슨 말인가.
“생각해봐라. 한은은 최종 결정 기구다. 나라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통화 정책을, 대통령에 보고하지도 않고 금융통화위원회 7명의 위원이 모여 결정한다. 그런데 선거를 통해 권한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들의 권한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중앙은행의 역할을 좁게 한정시켜 놓은 거다. 영국 등을 시작으로 물가 목표제가 도입되던 1990년대엔 물가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물가만 안정되면 얼추 경제가 안정되는 걸로 봤다. 그러니 중앙은행의 목표를 물가 안정으로 정해놓고 국민들에게는 ‘정부의 위임을 받고 물가 안정이란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한 거다.”

-많은 선진국에선 더 이상 물가가 이슈가 아니다.
“그러니까 ‘중앙은행의 역할이 뭐냐’는 질문이 나온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가 안정’이라는 단어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중앙은행의 목표는 경제 안정이다. 동태적으로 보자면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해야 안정적이라 볼 수 있으니 발전의 개념도 들어간다.”

-재임 중 ‘인플레 파이터’로 불렸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겠다.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가만 보고 통화 정책을 하는 중앙은행장은 아무도 없다. 물가는 안정됐는데 성장이 되지 않는다면, 물가는 안정됐는데 금융시장이 부서졌다면, 중앙은행장이 손 놓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은을 호민관에 비유한 게 지금도 회자된다.
“통화 정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정책은 마이크로(micro·미시) 정책이다. 재정 역시 예산을 얼마 풀 것이냐는 문제를 제외하면 돈을 어디에 쓸 것이냐를 결정하는 부분에서 미시 정책으로 봐야 한다. 미시 정책은 항상 특정 분야와 특정 계층을 지원한다. 나라 전체를 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하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대개 힘있는 집단이 과실을 가져 가고 서민들이 피해를 본다. 어느 사회건 구조적으로 그렇다. 통화 정책이 균형을 잡아줘야 서민 피해가 최소화된다. 그런 뜻이었다.”

-사회 전체를 보고 정책을 펼 만한 전문가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거시 경제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미시 정책은 자리가 많은데 거시 정책은 자리가 많지 않거든. 또 처음부터 거시 경제를 공부했다고 거시적 안목을 가지느냐, 그건 아닌 것 같다. 바이올린을 켠 사람이 훌륭한 지휘자가 되기도 하듯이, 미시 경제를 오래 공부했는데 돈의 흐름을 깨우쳤다고 할까, 전체를 보는 사람도 있다.”

-재임 중 한은 총재가 외로운 자리라고도 표현했는데.
“금통위는 국가 통화정책의 최종 의사 결정 기구다. 최종이라는 걸 사람들이 잘 이해 못한다. 누구한테 지시를 받지도 않고 보고도 하지 않고 결정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할까요’라고도, ‘이렇게 했는데 잘했죠’라고도 물을 수 없는 자리다.”

-큰 결정을 직접 내려야 한다는 중압감이 엄청나겠다.
“평소엔 금통위원들과 상의해 결정할 수 있어 낫다. 가끔 금리를 크게 움직이는 것과 같은 위험 부담이 큰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는 모두가 몸을 사리게 된다. 마음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결정이 잘못되면 어쩌지 하는. 그럴 땐 위원장인 총재가 위원들을 이끌어 줘야 한다. 가장 힘든 순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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