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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말이 씨가 된다는 진리

중앙선데이 2014.03.02 02:09 364호 27면 지면보기
지난 소치 겨울올림픽 때 쇼트트랙에 출전한 한국 선수들이 유난히 많이 넘어졌다. 그 안타까운 장면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런 짐작을 해봤다. 혹시 코치들이 선수들에게 “넘어지지 마라. 넘어지지만 않으면 우승한다”는 말을 반복하며 주의를 주다 보니 그 ‘넘어진다’는 단어가 선수들의 무의식에 각인됐고, 그것이 화를 부른 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앞으로는 선수들에게 “오뚝이처럼 중심을 잡아라. 훼방을 받더라도 중심만 잘 잡으면 돼. 중심!”이라고 표현을 바꿔 정신교육을 해주면 어떨까.

이는 내가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아니다. 언어생리학 또는 뇌과학 분야에서 밝혀진 말의 역학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 뇌는 문장보다 단어에 더 빨리 반응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다. 어떻게 그런가?

예를 들어보자. 싱가포르의 유명 작가 요진이 동료에게 볼펜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요진은 동료에게 이렇게 강조했다고 한다.

“난 검은색만 아니면 돼. 검은색은 칙칙하고 스산한 느낌이 들어 싫다고. 그러니 절대로 잊으면 안 돼.”

다음 날 동료가 전해준 볼펜 한 타(12개). 그런데 전부 검은색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요진에게 동료는 당당히 반박했다.

“네가 검은색, 검은색이라고 강조했잖아. 바쁜 하루를 보내고 볼펜을 사러 가게에 들어섰을 땐 머릿속에 ‘검은색’밖에 떠오르지 않더라고.”

흥미로운 결과다. 요지는 명확하다. “문장보다는 단어!” 문장은 기억되기 어려워도 반복해 발설된 단어는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된다는 사실. 기억해둘 일이다.

21세기 스포츠는 과학이다. 트레이닝에 과학적 분석과 맞춤 처방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코칭은 언어과학’이라는 사실이다. 코치진이 선수들에게 특정 메시지를 전할 때 언어가 지니는 고유 특성을 꼭 익혀두고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알고서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되 ‘언어과학’의 효과를 가장 짭짤하게 본 선수가 소치 겨울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2연패의 쾌거를 올린 금메달리스트 이상화 선수다. 이 선수가 소치 올림픽 직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2연패를 달성했을 때 한 기자가 물었다. “슬럼프는 없었어요?”

답변이 걸작이었다. “저는 슬럼프가 자기 내면에 있는 꾀병인 것 같아요. 마음속 어딘가 하기 싫은 구석을 슬럼프라는 핑계를 대면서 계속 안 하는 거죠. 저는 반대로 계속 도전했어요. 끊임없이….”

이 대답 속에 표현되지 않은 예지를 우리는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슬럼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슬럼프가 온다는 진실을 그녀는 에둘러 말한 것이다. 슬럼프라는 단어를 거부하면 슬럼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간파하고 있었던 셈이다.

언어과학은 이처럼 스포츠 분야뿐 아니라 우리 일상의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혜가 된다. 우리도 “그런 말, 내 사전에는 없다”며 어떤 언어는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나폴레옹이 “내 사전에 실패는 없다”고 말했듯 이상화 선수는 “내 사전에 슬럼프는 없다”고 말한 격이다. 우리 역시 그 단어를 버리고, 그저 꾸준히 연습하고 노력하려는 자세를 취할 때 좋은 결과가 동반될 것이다.



차동엽 가톨릭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장. 『무지개 원리』 『뿌리 깊은 희망』 등의 저서를 통해 희망의 가치와 의미를 전파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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