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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고대사] 국경 허문 신라, 피정복민 통합정책 대신 극심한 차별

중앙선데이 2014.03.02 02:17 364호 28면 지면보기
신라통일 후 백제·고구려인은 하층민이 됐다. 신라인은 각종 논공행상으로 부유층이 됐다. 성주사의 낭혜화상탑은 통일 후 김인문이 받은 봉토가 200년 동안 후손들에게 어떻게 세습됐는지를 알려준다. [사진 권태균]
신라의 삼한통합은 한국사의 진로를 신라 중심으로 이끌었다. 통일 신라에는 중요한 두 과제가 놓였다. 하나는 백제·고구려 피정복민을 신라인으로 편제하는 인사정책. 다른 하나는 삼한통합에 동원된 신라인들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다.

<6> 통일신라의 논공행상

태종무열대왕 7년(660년) 11월 22일 통일신라의 논공행상이 있었다. 백제를 정벌하고 온 뒤였다. 백제인들이 재능에 따라 임용됐다. 좌평(佐平, 백제의 1등 관위) 충상과 상영 그리고 달솔(達率, 백제의 2등 관위) 자간에겐 일길찬(신라의 7등 관위)을 주어 총관으로 삼았다. 충상과 상영은 660년 7월 9일 황산벌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이다(『삼국사기』 7, 태종무열대왕 7년). 그중 충상은 648년 백제로 가져갔던 품석과 고타소의 뼈와 백제 비장 여덟 명을 바꾸도록 의자왕에게 말한 사람이었다(『삼국사기』 41, 김유신 상). 상영은 660년 7월 신라와 당나라의 대군이 백제를 침공할 때 충신인 좌평 의직의 진언을 반대하였던 인물이다. 은솔 무수는 대나마(신라의 10등 관위)를 주어 대감으로 삼고 은솔 인수는 대나마를 주어 제감으로 삼았다(『삼국사기』 5, 태종무열왕 7년).

고구려인도 관직을 받았다. 문무왕 때인 670년 8월 1일 연정토의 아들 안승은 고구려왕이 됐고 이어 674년 9월 보덕왕이 됐다. 680년 3월 문무왕은 안승에게 누이동생(혹은 김의관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신문왕 3년(683년) 10월 안승을 불러 소판으로 삼고 김씨 성을 주어 서울에 머물게 하고 훌륭한 집과 좋은 땅을 주었다. 고구려인 중 안승은 특별히 진골 대우를 한 것이다.

그러나 안승과 충상·상여 같은 사례는 극히 드물다. 신라 왕경인(신라의 서울인 지금의 경주 사람들. 당시에는 대경·왕경으로 부름)으로 편입된 고구려인의 수는 많지 않았다. 안승의 후손들은 시간이 지나며 도태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백제 출신으로 관직을 받은 이들은 어떤 면에서 백제의 멸망을 도운 사람들이다. 실제로 피정복민으로서 왕경인이 되어 대우를 받은 이들은 신라를 위해 간첩활동을 하는 등의 공이 있었던 소수일 뿐이다.

삼국의 언어는 같았다. 그러나 사는 모습은 너무 달랐다. 공통성은 없었다. 다른 형식의 무덤이 그 한 예다. 왼쪽부터 신라의 대능원, 공주 무령왕릉 내부(백제), 지안 환도산성 아래 떼무덤(고구려).
같은 말 쓰는 동족이지만 신라인만 특권
고구려·백제·신라 사람들을 동족(同族) 또는 단일민족으로 보는 한국인들은 신라가 피정복국 사람을 잘 대우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삼국 관계는 특별한 면이 있었다. “고구려·백제·신라·물길을 포함한 동이(東夷) 중 말갈(靺鞨)이라고 부르는 물길(勿吉)의 언어는 홀로 다르다”(『북사』 94, 물길)고 한 것을 보아 삼국인은 말이 통했던 하나의 종족(種族)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왕의 호칭, 정치조직, 신분제도 등 모든 면이 달랐다. 또 5~6세기께 축조된 고구려의 장군총, 백제의 무령왕릉, 신라의 천마총이나 황남대총은 구조가 달랐다. 사실 삼국은 초기국가 형성 때부터 독립국이었고 하나로 뭉친 적이 없어 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면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삼한통합을 통해 비로소 신라 중심의 국가로 통합되었다.

정복자인 신라인들은 피정복민을 무섭게 차별화했다. 신라인은 우대해 정복자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했다.

먼저 백제인과 고구려인을 차등화해 신라인으로 만드는 작업을 보자. 신라는 그들을 동등하게 대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선 백제와 고구려의 지배세력들. 백제와 고구려의 왕과 그 일족 그리고 대신들은 신라인으로 삼을 수 없었다. 태종대왕이 보낸 5만 신라군과 당 고종이 보낸 13만 당군이 660년 7월 백제를 멸망시켰던 그해 9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 신하들 93명과 백성 1만2000명을 배에 태워 당나라로 돌아갔다(『삼국사기』 5, 태종무열대왕 5년). 668년 이적이 거느린 당나라 군사와 신라군이 평양을 포위하자 고구려왕은 항복했다. 이적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과 덕남 등 대신과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삼국사기』 6, 문무왕 8년). 그 때문에 두 피정복국의 왕과 그 일족, 고위 신료들과 많은 백성은 당나라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럼 포로는? 668년 문무왕은 고구려인 포로 7000명을 왕경으로 끌고 왔고, 문무 신료들을 거느리고 선조의 묘에서 제사를 지냈다(『삼국사기』 6, 문무왕 8년). 포로들의 운명에 대해 『삼국사기』에 나오는 구서당(九誓幢)은 실마리를 준다. 구서당의 아홉 군단 중 세 번째인 백금서당은 문무왕 12년(672) 백제민, 다섯째인 황금서당은 신문왕 3년(683) 고구려민, 여섯째인 흑금서당은 말갈국민(靺鞨國民), 일곱째인 벽금서당과 여덟째인 적금서당은 보덕성민, 아홉째인 청금서당은 백제 잔민(殘民)으로 당(幢, 부대)을 이룬 것으로 나온다(『삼국사기』 40, 무관). 문무왕의 7000포로는 지배세력들의 노비로 나눠주거나 후일 구서당과 같은 부대의 병사로 편입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안승은 진골, 충상과 상영은 골품제의 6두품 대우를 받았지만 구서당에 편입된 피정복민들은 평인(백성)이거나 하급 두품 신분을 가진 정도였다.

정복된 백제·고구려 옛땅에 사는 피정복민은 말하자면 면장 정도로 대우했다. 정복된 땅을 지방행정조직으로 새로 편제해 주군현(州郡縣)의 지방관인 총관(도독)·태수·현령에는 기본적으로 신라인을 임명했다. 그리고 그 밑 행정촌(현재의 ‘면’에 해당, 장은 5두품 대우를 받던 진촌주)과 자연촌(현재의 ‘이’에 해당, 장은 4두품 대우를 받던 차촌주)에는 피정복민을 촌주로 임명했다. 면장쯤으로 임명한 피정복민을 통해 통치 효율을 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말도 같아 신라인들은 통치하기도 쉽고 더 강력하게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고구려인들은 과거의 영광도 잃고 사회·정치적으로 도태돼 갔다.

반면 삼한통합 전쟁에 공을 세운 신라인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 걸쳐 광범위하게 논공행상을 했다. 원조 신라인들의 지위는 한층 높아졌다.

고구려·백제인은 하층 신분에 편제
668년 9월 21일 고구려를 평정한 뒤 10월 22일 김유신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을 내렸고 김인문에게 대각간(大角干)의 관위를 내렸고, 그 밖의 이찬으로서 장군이 된 사람들에게는 각간(角干)을 주고, 소판 이하는 모두 관위를 1등급씩 올려주었다(『삼국사기』 7, 문무왕 8년). 김유신에겐 660년 백제 평정 뒤 대각간을 내렸었다(『삼국사기』 38, 잡지 7).

관위(官位)에 따라 토지도 줬다. 669년에 문무왕은 전국의 마거(馬阹) 174곳을 아홉 구분해 나눠 주었는데 내성(內省, 왕궁의 일을 담당)에 22곳, 관부(왕정을 담당하던 관청)에 10곳, 태대각간 유신에게 6곳, 대각간 인문에게 5곳, 각간 7인에게 각 3곳, 이찬 5인에게 각 2곳, 소판 4인에게 각 2곳, 파진찬 6인과 대아찬 12인에게 각 1곳을 주고 이하 74곳은 편의에 따라 나누어주었다(『삼국사기』 7, 문무왕 9년). 이런 토지는 세습됐다.

성주사 ‘낭혜화상탑비(朗慧和尙塔碑)’에서 그런 사정을 알 수 있다. 태종무열대왕은 낭혜화상 무염(無染·800~888)의 8대조다. 낭혜화상은 845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성주사에 머물렀는데, 성주사는 김흔(金昕)의 조상인 임해공(김인문)의 수봉지소(受封之所, 봉토로 받은 곳)에 세워진 절이다. 탑비의 기록을 보면 삼한통합의 공으로 김인문 등이 받았던 토지가 거의 200년간 여러 대에 걸쳐 그의 후손에게 세습된 것을 볼 수 있다. 삼한통합에서 공을 세운 신라인의 후손이 번성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668년 9월 고구려를 정복했을 때 신라의 병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정벌을 시작한 지 9년이 지나 인력이 모두 다하였는데 마침내 두 나라를 평정하여 여러 대의 오랜 바람을 오늘에야 이루게 되었다. 반드시 나라에서는 충성을 다한 인정을 받아야 하고, 우리 군사들은 힘을 바친 상(賞)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라 했다(『삼국사기』 7, 문무왕 11년 조). 참전병사에겐 고구려 평정 후 관위를 1등급씩 올려주었다(『삼국사기』 7, 문무왕 8년). 관위가 오르면 보수가 늘어났고 신라인들의 생활은 한층 여유가 생겼다.

전쟁에서 죽은 자에게도 논공행상이 이뤄졌다. 669년 2월 21일 내린 교(敎)에 “지금 두 적(백제·고구려)이 이미 평정되었고, 사방이 안정되어 태평하다. 전쟁에 나아가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다 같이 이미 상을 주었고, 전쟁에서 죽어 혼령이 된 이에게는 명복을 빌 비용을 추증해 주었다”고 나오는 것으로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삼국사기』 7, 문무왕 9년).

신라인들은 옛 백제인과 고구려인에게 빚이 없었다. 신라인들은 피정복민을 차별화하고 도태시키는 정책을 율령으로 만들어 펼쳤다. 당시 이루어진 논공행상은 삼한통합을 이룬 신라인 그들의 잔치였다. 옛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은 그 잔치에 끼어들 틈이 없었고, 기본적으로 하층 신분으로 편제돼 한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종욱 서강대학교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 교수, 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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