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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 올림픽 전과 후

중앙선데이 2014.03.02 02:39 364호 31면 지면보기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진 후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다. 자존심은 무너졌다. 러시아인들은 훼손된 자존심을 희화화해서 이런 말을 만들어내곤 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문제뿐이네” 혹은 “문제가 없는 곳? 생각해내기도 어렵군” 같은 말이다.

소련이 직면했던 문제는 육체적 노력으로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계속 노력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해결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소련의 문제는 당시 사람들의 심리적인 문제였고, 해결하기가 훨씬 더 복잡했다. 다양한 여러 가지 문제 중 심리적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를 들라고 한다면 러시아인인 나는 ‘정체성의 상실’을 들겠다.

소련의 정체성 상실은 소련 국민들 모두가 겪은 문제였다. 그러나 소련의 구성원들 중에서도 특히 러시아에 심각한 흔적을 남겼다. 소비에트연방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주도했던 러시아인은 국가에 필요한 소련인 양성을 위해서라면 소련의 모든 심리적 틀을 수용했다. 대신 원래부터 존재해왔던 러시아의 정체성은 사라졌다.

그렇게 모든 걸 바친 소련이 붕괴했다. 그러자 더 큰 위기가 찾아왔다. 러시아인 외의 민족적 정체성은 여전히 백지로 남은 것이다. 이 문제는 소련 산하 여러 민족 및 나라들보다 러시아에 더 심각한 외상을 입혔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이 러시아인이 되었고, 본래 러시아민족만의 정체성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소련 붕괴 후엔 여권에 소속 민족을 표기하는 규정도 사라졌다. 모두가 ‘나는 러시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서 오히려 러시아인만의 정체성은 사라진 것이다. 소련 소속의 모든 공화국들 가운데 러시아만 고유의 국가를 갖지 못했다.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 이런 국가적 상징을 상실했고, 이후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그 상징을 만들어내야 했다.

소치 올림픽의 개막식·폐막식을 보면서 ‘러시아의 정체성’이라는 주제에 고개를 갸웃했을 분들이 있었을지 모른다. 일견 러시아는 나름의 정체성이 확고한 나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러시아의 정치·경제·문화·사회·스포츠 등 각계각층은 지난 20여 년간 이 질문을 매일 곱씹으면서 살아왔다. “우린 누구인가.”

소치 올림픽 전 다른 나라에서 치른 올림픽에서 러시아는 부진한 성적을 거뒀고, 과거 소련 국가대표팀의 영광을 기억했던 이들은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초라함을 새삼 곱씹어야 했다. 그 와중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소치 올림픽을 유치했고, 그 기회를 빌려 러시아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존재에 관련된 역사서, 소설, 방송 프로그램들이 대량으로 러시아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소치 올림픽은 성대히 막을 내렸지만 ‘러시아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남았다. 거시적 관점에서 러시아인의 먼 조상인 슬라브족에 대한 관심도 최근 지대해졌다. 예전엔 러시아에서 오히려 찬밥이었던 러시아음식 역시 최근 2년 동안 러시아 안팎에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이젠 러시아 내에서 스시를 파는 식당에서도 러시아 수프의 일종인 보르쉬를 먹을 수 있다. 블리니(러시아식 팬케이크) 등은 거의 모든 식당에 등장한다.

소치 올림픽은 러시아의 정체성 모색 과정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됐다. 그중 개막식과 폐막식은 하이라이트였다. 개막식과 폐막식은 러시아인이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도 강력했지만 러시아인 스스로에게도 강력한 메시지를 보냈다. 도스토옙스키의 명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의 조국 러시아 역시 발전적 해체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길 바란다.



이리나 코르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의 국제경제대학원을 2009년 졸업했다. 2011년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의 HK연구교수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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