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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녹여 먹게 했더니 … 펄펄 뛰는 발기부전약

중앙일보 2014.02.24 02:30 경제 2면 지면보기
경기도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에 있는 SK케미칼 생명과학연구소 실험실에서 최원재 선임연구원이 “먹기 편한 약이 좋은 약”이라며 테이프처럼 돌돌 말린 필름형 발기부전 치료제를 펴 보이고 있다. [오종택 기자]


“‘약은 물 한 모금 꿀꺽 마시면서 삼켜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습니다. 티 안 내고 몰래 먹고 싶은 약도 있잖아요. 약이 넘쳐나는 시대에는 약 먹는 방법도 약효만큼 중요한 거 아닙니까?”

 우표처럼 생긴 녹여 먹는 ‘필름형’ 발기부전 치료제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SK케미칼 최원재(41) 책임연구원의 얘기다. 그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2011년 12월 시장에 나온 필름형 치료제 엠빅스S는 소비자의 마음을 읽는 눈에서 나왔다. 발기부전 치료제라는 블록버스터급 시장을 개척한 글로벌 제약사 화이자(비아그라)도, ‘위크엔드 필(weekend pill)’이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인기인 시알리스 개발사 일라이릴리도 놓친 혜안이다.

가로 2.7㎝, 세로 3.7㎝ 크기의 필름형 발기부전 치료제와 알약의 약효는 똑같다. [오종택 기자]
 SK케미칼은 이 시장에서 출발이 한참 늦은 후발주자였다. 2007년 7월 자체 개발한 신약으로 엠빅스를 시장에 내놓았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1등 비아그라가 기록한 국내 매출(347억원)의 1% 남짓이 겨우 팔렸다. 시장은 이미 1998년 출시 직후 발기부전 치료제의 대명사가 된 비아그라와 효과 지속시간이 긴 장점을 내세운 시알리스, ‘국내 제약사 최초’라는 타이틀을 쥔 자이데나(동아ST)가 나눠 가진 후였다. 게다가 비아그라의 국내 특허가 만료(2012년 5월)돼 복제약이 쏟아져 나올 상황을 생각하면 엠빅스는 거의 시장 퇴출 직전인 상황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이 끝없이 이어지는 듯했다.

 그때 약의 모양을 연구하는 제제팀 소속 최 연구원의 머릿속에 ‘얇게 펴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SK케미칼의 정밀화학연구소 연구원 출신인 그는 폴리우레탄을 얇게 편 상업용 섬유개발 연구에 오랫동안 참여했었다. 그는 ‘약도 종잇장처럼 얇게 펴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기존 알약 치료제를 먹는 남성들은 약을 한 알씩 따로 포장해 가지고 다니곤 했다. 그만큼 몰래 먹고 싶어 한다는 뜻이었다. 휴대하기 편한 우표처럼 작은 약. 그는 무릎을 탁 쳤다. 약은 아니지만 수퍼에서 파는 필름형 구강청정제가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던 터였다.

 최 연구원의 제안에 연구소에서는 갑론을박이 오갔다. 무엇보다 선례가 없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화이자가 2000년 세계 최초로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필름형 구강청정제를 만들어 글로벌 히트상품으로 키웠고, 미국 등에서 수퍼 판매용 감기약을 필름형으로 만든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을 필름형으로 만든 사례는 국내외를 통틀어 전무했다. 녹여 먹어야 하기에 쓴맛이 나지 않아야 하고, 약효도 알약과 똑같이 유지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연구원은 확신했다. 그는 “혼자서 마음고생을 하는 한국 남성들을 생각하면 발기부전 치료제로는 휴대하고 먹기 편한 필름형이 딱”이라고 말했다.

 사실 발기부전 치료제는 대다수 한국 남성들이 드러내 놓고 먹기 힘든 약이다. 발기부전을 고혈압처럼 당연히 치료하고 관리해야 할 만성질환으로 여기지 않고, 남성성의 상실로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 탓이다. 이형래(비뇨기과) 강동경희대병원 교수는 “한국 성인 남성의 30%가 발기부전으로 치료받지만, 혼자서 끙끙 앓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최고의 성인 남성 흡연율(43.7%)과 육류를 즐기는 서구화된 식습관, 스트레스가 심한 환경 등의 이유로 당뇨·고혈압·고지혈증 환자가 늘면서 발기부전 환자도 증가하고 있다. 알약형 엠빅스에 출구가 필요했던 경영진도 최 연구원이 낸 시제품을 받아들고는 투자를 결정했다. 시장에서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한 연구원의 아이디어에 20억원의 설비투자가 결정됐다. TF팀도 꾸려졌다. 최 연구원은 “실패했을 때 회사가 감당해야 할 손해를 생각하면 밤에 잠이 안 왔다”고 말했다. 제품 개발, 생산, 임상시험, 식약처 허가 등 단계마다 담당 직원들이 달라붙었다. 하지만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은 험했다. 물 없이도 녹여 먹을 수 있는 치료제를 만들려면 맛이 좋아야 하는데, 성분 특성상 나타나는 쓴맛이 문제였다. 그는 “아무리 좋은 약도 쓰면 먹기 싫어진다”며 “쓴맛을 없애려고 향신료부터 캐러멜, 인삼향까지 별의별 생각을 다 해봤다”고 말했다. 최 연구원과 팀원들은 넉 달 넘게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한 끝에 원료 물질에서 특정 성분을 제거해 쓴맛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번엔 상업용으로 대량생산을 위해 필요한 설비 단계에서 복병을 만났다. 국내 기계제조업체들이 모두 “이런 기계는 처음”이라며 “못하겠다”고 손사래를 친 것. 최 연구원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독일 한 기계제조사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1년 뒤에나 기계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최 연구원은 “머지않아 비아그라 복제약들이 쏟아질 것을 생각하면 1년간 기계만 기다리고 있으라는 건 한가한 소리였다”고 말했다. 고민 끝에 기존 거래처였던 일본 오사카의 기계제조업체를 설득했다. 그는 “기계 만드는 기간을 줄일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제가 이미 기계를 디자인하고 있더라”며 웃었다. 그는 SK케미칼이 가진 기존 설비를 재활용하는 등 아이디어를 짜낸 끝에 4개월 만에 세상에 없던 기계를 만들어냈다. 식약처는 이 약을 계기로 필름형 의약품에 대한 허가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허가신청 업무를 담당한 SK케미칼 이윤정 과장은 “매뉴얼이 없는 유형이라 식약처가 어떤 서류를 요구할지 몰라서 신약 2개 분량으로 서류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2011년 12월 시장에 나온 엠빅스S는 그때부터 반전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마음을 헤아려 준 약에 환자들은 손을 뻗었다. 출시 보름 만에 매출 10억원, 50일 만에 30억원을 기록했다. 현재 전체 발기부전 치료제 시장의 11%를 차지하는 필름형의 70%는 SK케미칼이 공급한다. 상황이 바뀌자 잘 안 만나주던 의사들이 먼저 영업사원들에게 만나자고 연락해 왔다. 한림대 강동성심병원 양대열 교수는 “필름형 약은 처방하는 의사나 복용할 환자 모두에게 획기적인 사건이었다”며 “국제적으로도 필름형 발기부전 치료제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깜짝 놀란 경쟁사들도 재빠르게 필름형 치료제 제조에 착수했다. 이듬해인 2012년 5월 비아그라 특허가 만료된 이후 쏟아져 나온 복제약들이 재빨리 필름형을 출시했다. 지난해엔 발기부전 치료제의 대명사이자 원조인 비아그라도 필름형이 나왔다. 화이자가 필름형 제조 기술을 가진 국내 제약사 한 곳과 손잡고 만들었다. 현재는 국내 8개 제약사가 필름형 제품을 출시 중이고, 러시아·중국·리비아 등 해외에 수출 계약을 체결한 제약사도 속속 나오고 있다.

글=박수련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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