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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가 천대 받던 시절 그 음악에 젊음 건 예술가

중앙선데이 2014.02.21 23:51 363호 24면 지면보기
‘인사이드 르윈’의 주인공 르윈 데이비스는 포크송을 잘 부른다. 그것 말고는 매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천생 ‘루저(loser)’다. 버릇없고, 무책임하고, 게으르다. 아무한테나 빌붙어 하룻밤을 자고, 저녁이면 뉴욕의 지하 카페에서 노래 부르고 푼돈을 받아 겨우 하루를 버틴다. 인간성도 별로다. 빌린 돈 갚지 않는 건 예사고, 다른 동료 가수들을 재능 없는 속물이라고 빈정댄다. 그들과 달리 자신은 예술을 한다는 은근한 자부심을 내비치는 ‘허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밥맛’이 기타를 튕기며,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때면 주위를 감동시킨다. 이런 남자, 당신은 지지할 수 있을까? 혹은 연민을 느낄 수 있을까?

코언 형제 새 영화 ‘인사이드 르윈’

결론부터 말하자면 감독 코언 형제는 데이비스를 예술가의 한 초상으로 보고 있다. 아무도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주지 않고, 간혹 자기 자신도 그것이 의심스러워 다른 일을 찾아 방황하기도 하지만, 그런 궤적 자체가 예술가의 일상, 혹은 운명의 수레바퀴라고 보고 있다. 르윈 데이비스는 코언 형제가 미국의 1960년대 포크 문화를 배경으로 펼치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인 셈이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곧 바로 포크의 매력을 십분 보여준다. 주인공 르윈 데이비스(오스카 아이작)가 카페에서 ‘나를 목매달아줘’를 부르는 장면이다. 그동안 돌아다니며 고생을 너무 많이 했고, 그러니 차라리 목을 매달아 달라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영화 속 캐릭터의 운명을 암시하는 공연장면인데, 멜랑콜리한 회녹색 조명과 어울려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충분히 예견케 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짙은 회녹색 컬러 속에 진행된다.

데이비스는 코언 형제의 희비극에 종종 등장하는 편집광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바톤 핑크’(1991)의 무능한 할리우드 작가 지망생과 비교하면, 그나마 그에겐 재능이 있다. 문제는 그 재능을 발휘하는 영역, 곧 포크라는 게 전혀 음악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데 있다. 아직은 포크가 사랑받기 전인 1961년이 시대적 배경이다. 데이비스는 자신의 일에 자긍심을 가지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일 자체를 무시한다. 예술이기는커녕 건달의 겉멋으로 폄하한다. 여행 중에 만난 재즈뮤지션은 데이비스가 자신을 포크가수라고 소개하자 “뮤지션이라더니”라고 반문한다. 포크가 무슨 음악이냐는 냉대다.

데이비스는 시카고로 운명을 건 여행을 한다. 새로운 에이전트를 만나 새로운 음악에 도전해볼 참이다. 시카고의 하늘은 여전히 흐리고, 길은 눈과 비로 진창이 되어 있다. 데이비스가 어떤 미래를 만날지, 우리로선 짐작하고도 남을 환경이다. 기껏 시카고에 간 데이비스는 출세를 하고 싶다면서, 여전히 운명이라는 듯 포크를 부른다. 그것도 아기를 출산하다 죽은 여자에 관한 어두운 노래다. 포크라는 게 주로 하층민(folk)의 애환을 위무하는 노래인데, 그것으로 세속적인 성공도 거둔다는 게 논리적으로 잘 맞지 않는데도 말이다. 시카고의 에이전트는 “돈이 보이지 않는다”고 단번에 퇴짜를 놓는다.

시카고로의 여행이 영화의 정점이다. 고전서사의 공식에 따르면 대개 여행은 ‘율리시스의 귀환’이기 싶다. 곧 주인공은 율리시스처럼 먼길을 다녀온 뒤 고향에서 영웅의 귀환 혹은 자기구도의 성공을 제시한다. 그게 스토리가 있는 모든 예술장르의 서사적 쾌락이기도 하다. ‘인사이드 르윈’은 이런 기대감도 배반한다. 데이비스는 뉴욕으로 돌아오는 밤길에서 라디오를 통해 말러의 자기성찰적이고 비극적인 ‘교향곡 4번’ 4악장을 듣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그의 삶이 극적으로 변하는 것은 거의 없다. 그 음악을 들을 때는 밤길 고속도로에서 들짐승을 치는 사고를 냈고,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짐승의 모습에서 불행하게도 자신의 운명을 얼핏 느꼈을 텐데도 말이다.

데이비스는 뉴욕에서도 여전히 포크를, 그것도 ‘나를 목매달아줘’ 같은 우중충한 것들을 부른다. 하지만 실수투성이에 간혹 비열함까지 보이는 평범한 남자인데,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포크송을 노래하는 그 순간만은 무대 위의 유일한 영웅이다. 그 장면은 예술이라는 운명의 덫에 걸려 비틀거리는 모든 청년에 대한 코언의 동지적 헌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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