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큰 물에서 제대로 놀자 … 한국선수들 ‘카르페 디엠’ 바람

중앙선데이 2014.02.22 23:45 363호 4면 지면보기
1 스피드 스케이팅 이상화(우측)와 박승주가 직접 쓴 플래카드를 들고 쇼트트랙 경기장을 찾았다. 2 스켈레톤 윤성빈은 자신의 경기화 뒤축에 ‘보고 있나!’라는 글자를 써넣었다. 경기 후 가족과 친구를 향한 메시지였다고 말했다.
3 봅슬레이 남자 2인승에 출전한 원윤종(앞)과 서영우는 이 종목 역대 최고 성적인 18위로 경기를 마감했다. 4년 뒤 평창에서 메달권 진입을 다짐했다. [소치 AP=뉴시스]
“도전해 본 것, 정말 후회 없다.”

즐기는 올림픽으로 진화하는 대한민국

생애 첫 올림픽 출전에서 대한민국 모굴스키 사상 최고의 기록(결승 2차전 출전, 최종 12위)을 세운 최재우(20·CJ제일제당). 그는 11일(한국시간) 2014 소치 겨울올림픽 남자 모굴 결승 2차전에서 공중묘기 후 중심이 흔들려 코스를 이탈했다. 평소 하던 대로만 했다면 10위권 진입은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승 2차전 출발선에 선 최재우는 다른 선택을 했다. 고난도 3회전 점프를 한 뒤 활주 속도를 더 높였다. 결국 턴을 하다가 정해진 코스 밖으로 미끄러졌다. 최재우는 “무난하게 경기를 마무리했다면 오히려 후회했을 것”이라며 “모 아니면 도다, 도전해 보자 하는 뜻에서 했던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스켈레톤 종목에서 한국 역대 최고 순위인 16위를 기록한 윤성빈(20·한국체대)도 과감한 도전을 택했다. 이번 올림픽에서 1~4차 레이스 합계 3분49초57의 기록으로 16위, 한국 최고기록(강광배·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20위)을 갈아치웠다. 그는 3차 레이스에서 안정적인 레이스 대신 모험을 택했다. 1, 2차와 마찬가지로 벽에 부딪힌 뒤 코스를 타면 무난하게 다음 코스에 진입할 수 있었지만 속도를 높이기 위해 왼쪽 벽과의 충돌을 피했다. 썰매가 흔들려 속도에서 도리어 손해를 봤다. 그는 “큰 실수를 한 것이 내겐 값진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의 경기화 뒤축에는 ‘보고 있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우리 선수들이 달라졌다. ‘참가에 의의를 뒀다’는 선수들, 즉 메달권 진입 가망이 거의 없다던 선수들이 오히려 더 주목을 받고 있다. 큰 물에서 제대로 한 판 벌인 그들의 모습은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남자 모굴 최재우가 자신의 SNS에 알파인스키 경성현을 응원하는 글을 올렸다.
‘스마트 세대’답게 경기를 즐기는 방법도 진화했다. 예전 선수들처럼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채 비장한 임전 태세를 갖추기보다는 틈틈이 SNS로 응원도 듣고 속내를 털어놓으며 스스로를 북돋는다. 최재우는 “예선이 끝나고 휴대전화를 보니 응원 메시지가 엄청나게 와 있었다”며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에 더 가슴이 뛰었다”고 말했다. 스노보드 이광기(21·단국대)도 경기가 끝난 12일 자신의 SNS에 ‘오늘 내 첫 큰 무대가 끝났다. 성공보다 값진 건 실패라고 하니 더 잘해 보자’라고 실시간 소감을 올렸다.

김수철(38)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국가대표팀 코치 역시 경기 후 선수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자신의 SNS에 빼곡히 올리며 ‘팬 서비스’를 톡톡히 했다. 그는 “전지훈련이 길어 외롭고 부상이 잦아 힘든 종목인 만큼 대회 후 선수들과 더 신나게 즐겼다”고 말했다.

선수들의 현장 응원도 이슈였다. 경기가 비교적 일찍 끝난 모굴 선수들은 이상화·모태범의 스피드스케이팅 경기를 보러 갔다. 여자 컬링의 경우 인기가 너무 좋아 선수들조차도 현지에서 표를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금메달리스트 이상화도 박승주(24·스피드스케이팅)와 함께 여자 쇼트트랙 경기마다 찾아가 ‘파도타기’ 응원을 했다. ‘이미 당신들은 오(최고)’라고 적은 이상화의 플래카드는 화제를 모았다. 선수들도 관중이 되어 ‘겨울 스포츠의 축제’를 만끽하는 모습이었다.

겨울 종목은 ‘자연과의 싸움’이자 ‘자신과의 싸움’인 경우가 많다. 상대 선수와 몸을 부딪는 경우가 적고 나 홀로 기록을 만드는 경기가 많다. 추위·마찰력과 싸우다 보니 긴장감은 더 큰 부상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스노보드 김수철 코치는 “영하 17도에 두 발도 묶어놓은 상태라 긴장을 하면 부상 위험이 더 크다”며 “종목 특성상 일부러라도 더욱 즐기고 자유롭게 경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수들의 분위기도 다르다. 한계를 뛰어넘는 기술을 뽐낸 선수에 대해 서로 인정하고 칭찬한다. 김 코치는 “새로운 기술을 성공한 뒤 착지했을 때의 쾌감을 서로 잘 알기 때문에 분위기가 신나고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값이 많이 나가는 겨울 종목 특성상 경제적 여유가 있는 선수도 많다. 스키, 보드를 비롯해 장비 값만 기본 200만, 300만원을 훌쩍 넘기는 종목이 대부분. 이세중 SBS 썰매 해설위원은 “빌려 탄 썰매로 이슈가 되던 봅슬레이에서도 현재는 상당히 풍족한 환경이 조성됐다”며 “겨울 종목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여름 종목에 비해 더욱 즐기는 분위기일 수 있다”고 말했다.

취미로 시작한 선수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썰매의 경우 강광배 국제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FIBT) 부회장이 썰매팀을 이끌던 1990년대, 2000년대 초반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2009년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봅슬레이편’을 보고 썰매에 도전한 사람이 크게 늘어서다. 문대성 IOC 선수위원은 “특히 설상 종목의 경우 아마추어에서 즐기던 친구들이 실력을 가다듬어 올림픽에 출전한 경우가 많다”며 “도제식으로 키워진 타 종목 선수들과는 분위기부터가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여자 프리스타일 스키 하프파이프에 출전한 박희진(35·광주스키협회)은 서른이 다 돼 이 종목을 처음 접했다. 미술대를 졸업한 그는 현재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국내 여자 모굴 간판 서정화(24·GKL)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를 휴학한 학생이라 ‘공부하는 선수’로 불렸다.

운동선수로서 올림픽 메달리스트에 대한 꿈은 당연하다. 큰 무대에서 뛸수록 눈도 높아지기 마련. 모굴 최재우는 “비인기 종목 선수들의 롤 모델은 수영의 박태환”이라고 주장했다.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종목에서 메달을 따내 비인기 종목이던 수영을 활성화시켰다는 이유에서다. 최재우는 “나 또한 평창에서 롤 모델처럼 될 것”이라며 “2018년이면 내 나이대도 우리 종목(모굴스키)에서 딱 좋을 시기”라며 웃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1세대’의 성과가 4년 뒤 평창에서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도 우세하다. 이세중 해설위원은 “소치 올림픽을 통해 새로운 종목들이 집중 조명돼 선수 풀도 더욱 넓어질 것”이라며 “선수들이 즐기며 도전하는 모습이 미래 꿈나무들에게 더 큰 자극이 된다”고 말했다.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새로운 ‘효자종목’들을 기대해 볼 수 있는 이유다.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