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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아산정책연구원 공동기획] 권력 앞에서도 대놓고 바른말 … 왕도 껄끄러워한 선비

중앙선데이 2014.02.23 00:57 363호 14면 지면보기
스스로를 남인(南人)의 후손으로 인식하는 교육자 출신 김창회씨(79). 불천위(위대한 선비)인 7대 조부 김종덕의 사당 가까이 집이 있어 자주 둘러본다. 그는 “나한테는 가장 뚜렷한 조상이니 모시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게 영남의 선비 가문답게 사는 방식이라고 한다. 조용철 기자
1649년 4월 29일, 이른 새벽. 왕세자(후에 효종)는 기상했다. 간단한 아침 식사 뒤 와병 중인 부왕 인조에 문안드렸다. 오전 6시, 상참(왕과 신하의 국정 논의)에 이어 아침 서연(書筵·왕세자에게 경서를 강론)을 시작했다. 주제는 『중용장구(中庸章句)』. 인조의 병세가 위급해 조강은 다음 날 중단됐다. 5월 8일 왕이 승하하고 6개월 뒤 10월 23일 조강은 재개됐다. 이젠 왕에 대한 경연(經筵)이었다. 『중용장구』를 다시 시작했다. 왕이 됐다고 봐주지 않았다. (김종수의 『효종동궁일기』를 통해 본 경연)

한국문화대탐사 ⑧ 선비<上>

경연 장면은 효종 기록이 없어 선조를 통해 유추해 본다. 1567년 음력 11월 초5일. 즉위 넉 달째인 이날 16세 선조는 경연을 한다. 선왕 명종의 비 인순황후와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조는 먼저 복습했다. 이어 강학관이 『대학』 ‘정심장(正心章)’의 ‘몸을 닦음이 마음을 바로함에 있다함은…’을 원문으로 두 번 읽고 풀이를 한 번 읽었다. 임금은 원문 한 번, 풀이 한 번을 읽었다. 다시 강학관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의 차이’ ‘찰(察·살핀다)이라는 한 글자가 병을 다스리는 약’을 강론했다. (유희춘의 『미암집(眉巖輯)』)

갑자기 왕세자가 된 효종은 세자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조강은 물론 석강, 야대, 소대(대신을 불러 강의를 들음)까지 했다. 세자의 아침 서연은 동절기 오전 9시, 하절기 오전 6시에 시작됐다. 왕세자 시절~즉위 한 달인 33개월 중 4개월간 서연이 없었는데 병 때문이었다. 대신들은 틈을 주지 않고 공부시켰다. 효종의 왕세자(현종)도 신하들의 강권에 8세부터 서연을 시작했다. 강의하는 대신들은 학문과 덕을 갖춘 선비들이었다.

현대와 크게 다른 모습이다. 어느 장관이나 학자가 ‘감히’ 대통령에게 철학을 가르칠까. 큰 가르침으로 왕을 교육하던 조선의 시스템이 현대엔 없다. 대통령은 지시하고 통치할 뿐이다. 조선에선 왜 신하가 임금을 가르쳤을까.

경북 안동에 있는 학봉 김성일의 사당. 퇴계의 학맥을 이은 그를 후손들은 소중히 모신다. 지난 2월 4일 후손들이 사당에서 절을 하고 있다.
서울 명륜동의 문묘(文廟)에 답이 있다. 그곳엔 동방 18현이 종사(從祀)돼 있다. 문묘는 공자를 받드는 사당. 종사는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모시는 것이다. 이들은 가장 숭앙받는 선비들이다.

선비란 대체 무엇인가. 서울대 정옥자 명예교수는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사람이다. 수기는 인격수양과 학문도야다. 자기를 닦은 다음 남을 다스리는 이가 선비”라고 말했다. 동양대 선비사관학교 김덕환 교수는 “경(敬)의 마음을 갖고 수양하는 학인”이라고 말했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한국의 선비정신과 정의사회의 구현’에서 “도(道)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게 임금-문묘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왕은 임금(君)이자 스승(師), 즉 군사다. 왕은 선비의 주군이자 스승이다. 으뜸 선비다. 선비 없인 왕 없고, 왕이 없으면 선비도 의미가 없다. 왕과 선비는 상호 의존 관계다. 고려대 윤사순 명예교수는 ‘16세기 초 선비정신의 형성에 대해’에서 ‘『조선경국전』은 정치체제로 군주제를 규정하지만 운용상 군주의 독선과 횡포 및 독재를 방지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왕권은 선비의 제약을 받았다. 정옥자 명예교수는 “조선 성리학은 신권을 강화하고 여론을 중시하고 왕에게 철인(哲人)이 될 것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는 논문에서 사대부적 정치문화의 특징으로 ▶군주와 함께 정치함 ▶신하는 의(義)를 위해 군주를 보좌함 등을 꼽았다.

그래서 임금도 선비의 뿌리인 공자에게 머리를 숙였다. 태종이 성균관에서 알성(謁聖·성인 공자를 봄)할 때 왕은 절을 해야 했다. 태종은 “왕인 내가 왜 공자에게 절을 해야 하느냐”고 예조판서에게 물었다. 판서는 “공자는 만세백왕지사(萬歲百王之師)이므로 절해야 한다”고 했다. 왕은 절했다.(『태종실록』 권28, 14년, 7월 임오조)

‘왕은 으뜸 선비이며 나라를 함께 다스린다’는 의식은 조선 선비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존왕(尊王)은 해도 절대 복종은 안 한다. 그래서 경연과 상소에서 추상같이 말할 수 있다. 경연 내용을 기록한 기대승의 『논사록』을 보자. 명종 19년 2월 13일 기대승은 “언로는 국가에서 매우 중대합니다… 그러나 지금 언로가 크게 열려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선조 즉위년(1567년) 10월 29일엔 “임금은 이익을 독점하지 말고 백성과 함께 해야 한다”고 했다.

남명 조식은 명종 10년 단성 현감을 사직하면서 을묘사직소를 올렸다. “전하의 국사는 그릇돼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은 떠났고 민심도 이반되었습니다. 큰 나무가 백년 동안 벌레에게 파 먹혀 진액이 말랐는데 회오리와 사나운 비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것과 같으니…”라고 성토한다.

지난 1월 23일 경북 의성에서 만난 김용수씨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학봉 김성일의 일화를 소개했다. 학봉이 “(임금의) 자질이 고명해 요순이 될 수 있지만 지금 상감께서 바른말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대놓고 말하는 선비들이 조선 조정엔 흔했다. 오늘날 국무회의 석상에선 수석과 장관들이 보고하고 ‘하명’을 받아 적기에 바쁜 모습이다. ‘대통령을 정면 비판하는’ 수석과 국무위원은 찾아볼 수 없다니 선비정신의 퇴보인가.

조선 선비는 신하이자 학자였다. 신하로선 왕에 복종했지만 학자로서는 유학의 거장이 종사된 문묘의 정신을 따른다. 어명보다 도(道)에 맞는지가 중요하다. 도가 없으면 반정을 생각했다. 연산이 예다. 선비는 임금이 불러도 사양할 수 있었다. 학자이기 때문이다. 퇴계가 올린 소·차·장·계 44회 중 36회가 임금이 부르는 데 대한 거절이다. 율곡은 52회 중 24회가 거절이다. 남명도 13번 모두 거절했다. 성리학 체계에서 선비는 왕의 협조자이자 비판자였다. 선비의 정통성은 협조-비판의 양면성을 가진 인물로 이어졌다.

다시 문묘로 돌아가 보자. 종사된 인물은 선비정신의 구현자다. 가장 먼저 종사된 정몽주는 조선 개국에 반대했다. 정여창·김굉필은 연산군 때 사사(賜死)됐고 조광조는 중종의 사약을 받았다. 이언적은 명종 때 귀양지에서 죽었다.

한국항공대 최봉영 교수는 1983년 조선시대 종묘에 종사된 왕통(王統) 중심 83명과 문묘·서원에 종사된 도통(道統) 중심 75명을 비교했다. 종묘에는 왕가에 공이 있는 사람, 문묘·서원엔 유학을 떨친 인물을 모신다. 태조~중종 전기 153년간 왕통·도통이 중첩되는 인물은 없었다. 훈구 대신에 의해 선비들이 죽어나가던 시절이었다. 인종~숙종 176년간 둘이 일치하는 선비가 나왔다. 김안국·이언적·이황·이이·김집·김상헌·송시열·박세채·김만기 9명이다. 선비의 중흥기다. 둘이 일치하지 않은 경종~고종 173년간 세도정치가 출현했다.

보통 선비의 이미지는 인조~숙종 기간에 이름을 떨치거나 도의 맥을 이어받은 선비다. 명분을 세우고, 현실 개혁의지가 있고 왕에 대해 비판적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선비는 흔히 ‘벼슬하지 않은 처사로서의 선비’ ‘벼슬에 나간 대부(大夫)로서의 선비’로 나누지만 이런 형식적 구별 외에 참된 선비인 진유(眞儒)·통유(通儒)와 썩은 선비 즉 부유(腐儒)로도 나눴다.

어쨌든 참된 선비들은 무엇을 추구하느냐는 물음이 남았다. 취재팀은 선비 연구 학자 20여 명의 말과 논문을 종합해봤다. 그 결과 선비의 핵심 가치는 도(道)와 수기였다. 경상도·충청도·호남을 돌며 서인·노론·남인의 후손에게 물어도 비슷했다. 서인의 영수 율곡은 ‘참된 선비는 나아가서는 도를 행해야 한다”고 했다. 남인의 영수 퇴계는 도의 핵심으로 경(敬)을 최대 가치로 여겼다.

성균관대 이장희 명예교수는 ‘조선시대 선비상’에서 “선비는 덕치주의 실현이 최상의 목표이며 인의예지충신락을 갖춰야 한다”며 “특히 예의염치를 중시했다”고 말했다. 숭실대 철학과 곽신환 교수는 “도는 사람이 사는 진정한 의미다. 오늘날 말로 국민 행복, 당시는 정복(正福)이라 했다”며 “구체적 내용은 ‘편어국리어민’(便於國 利於民·나라를 편하게 하고 백성에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선비는 신독(愼獨·스스로 삼감)하며 위기지학(자신의 수양을 위한 학문)을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왕에게 추상같이 요구하듯 엄격히 살았는가. 참선비의 길은 힘들었다. 어려서 소학을 배우고 10세에 스승을 찾아 집을 떠나야 했다. 40에 벼슬에 나가 70에 물러나는 것이 정통의 길이었다. 10~39세에 수기와 치인(治人)을 위한 공부를 했다. 그 뒤 벼슬길로 나갔다. 그런데 ‘벼슬에 들어가고 물러 나옴’ 즉 출처(出處)가 중요했다. 퇴계는 그 기준으로 ▶어리석음을 숨기고 벼슬을 훔치는지 ▶병든 몸으로 녹봉만 타먹는지 ▶헛된 이름으로 세상을 기만하는지 ▶그릇됨을 알면서도 무턱대고 나가는지 ▶직책을 감당할 수 없는데 물러나지 않는지를 꼽았다. 남명은 “사군자의 대절(大節)은 오직 출처 하나”라고 했다. 율곡도 “벼슬에 나가서 행할 만한 도가 없고 물러나서 수범이 될 만한 가르침이 없다면 선비로 자처해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윤선도도 “선비는 구차하게 벼슬에 나가서 안 된다”고 했다. 오늘날 정치권을 비롯해 사회에서 그런 건강한 기준은 사라지고 혼탁해졌다. 그러나 조선 선비는 그런 가치를 추구했다.

벼슬에서 겪을 고난도 선비는 견뎌내야 했다. 정조가 “선비라면 입신 초기에는 응당 추자도나 흑산도에 유배 갈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은퇴하면 문집을 발간해 자신의 지적 활동을 점검해야 했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벼슬하지 않는 처사라도 몸가짐을 가다듬어야 했다. 순암 안정복은 『하학지남』에서 하루를 숙흥장(새벽)-일간장(낮)-야매장(저녁)으로 나눠 일과를 설정했다. 최고 모델은 퇴계 11대손인 향산 이만도가 애지중지했던 윤최식의 『일용지결』이다. 그는 하루를 12등분해 매시간 할 일을 숨막힐 정도로 정했다.<표 참조>

처사가 많은 남인의 본향, 경상북도에는 선비 흔적이 아직 있다. 지난 1월 22일 경북 영덕 출신인 퇴계학연구원 이용태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어릴 때 선비를 늘 봤다. 선비로 꼽히는 10여 명은 시를 쓰고 역사를 논하고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회고했다. 지난 2월 4일 경북 의성에 가니 선비적 분위기가 은은했다. 전통 한옥과 사당이 여기저기 있다. 교육자 출신으로 한복을 단정하게 입고 자신을 남인(南人) 후손으로 인식하는 김창회(79)씨는 “다 못살았지만 선비는 일찍 일어나 사당에 가고 아침 식사 뒤 글을 읽거나 아니면 농감(농사 감독)을 했다. 학식이 출중한 선비는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그의 집은 위대한 선비 불천위를 배출한 가문. 집 가까이 있는 사당에 자주 들른다.

선비정신은 18세기 이후 흐려졌지만 구한말 위정척사, 동학, 개화운동으로 이어져 광복 뒤 재야-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는 평을 받는다. 지금은 거의 잊혀졌다. 그러나 품격과 교양을 갖춘 미래 인간의 원형은 선비정신에 있다. 소중한 우리의 가치다. 세상이 흐리다는 탄식이 나오는 오늘, 선비 담론을 본격화할 시간이 다가오는가. 사마천은 “날씨가 추워진 뒤에 송백(松栢)의 푸르름을 알게 되고 세상이 혼탁해야 맑은 선비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사기』 권 61 백이열전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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