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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학자 “조선 500년 지탱한 힘은 선비들 논의로 정하는 ‘공공’ 개념”

중앙선데이 2014.02.23 01:00 363호 14면 지면보기
『조선왕조실록』에는 ‘공공(公共)’이란 단어가 600건이 넘는다. 중국에선 왕조실록에 해당하는 『이십오사(二十五史)』에 14건, 『자치통감(資治通鑑)』에 6건, 『명실록(明實錄)』에는 10건이다. 일본 센다이(仙台)의 도호쿠(東北)대학 가타오카 류(片岡龍) 교수가 분석한 결과다. 그는 “이 엄청난 차이가 조선왕조 500년이 존속한 이유”라고 말한다.

한·중·일 3국의 선비 문화

가타오카 교수에 따르면 중국과 일본에서 ‘공(公)’은 왕이나 위정자를 뜻하고 ‘사(私)는 아랫사람을 말했다. 그러나 조선에선 ‘공’과 ‘사’ 사이에 ‘공공’이 있다. 선비들은 공공을 통해 의사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에도 헌법에 ‘공공의 복지’라는 것이 있지만, 이것은 위에서 뭔가를 해준다는 의미여서 조선의 공공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한국 선비의 독특한 역할에 대한 일본적 진단이다.

한국 특유의 ‘선비’는 어디서 기원한 것일까.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옛날 소도 제단의 무사를 선비라 칭했다. 고구려에서는 검은 옷을 입어 조의선인이라 했고 신라에서는 화랑이라 했다. 선비는 정예 무사집단”이라고 주장한다. 선(仙)의 무리로서 선배 제도는 고구려 태조왕대에 창설돼 고구려 강성의 기반이 됐고 신라의 화랑은 진흥왕이 고구려의 선배 제도를 모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배’라는 이름을 유교에 빼앗기고 조선은 무풍(武風)을 천시해 무사적 자취가 전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대 정옥자 명예교수는 “고조선의 단군도 선비라는 주장이 있지만 자료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익숙한 선비 개념은 대체로 조선시대에 자리잡은 유학적 인간형이다. 실제로 선비라는 순수한 우리말이 언제부터 쓰여졌는지는 정확한 시기를 알기 어렵다. 세종 25년(1443)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사(士)와 유(儒)의 글자풀이를 ‘선’나 ‘선’로 표기했다. 선비라는 말이 처음 나왔지만 그 이전에 쓰였음을 보여준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의 ‘명치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의 도전’ 논문에 따르면 중국에선 선비적 정치문화가 송대에서 시작해 명대에 꽃을 피웠다. 명대의 과도관(科道官)은 언관의 비판 기능을 발휘했고, 사대부들의 학문 네트워크도 활발했으며, 규제는 있었지만 상서(상소)도 역할을 했다. 그러나 청(淸)대 들어 위축된다. 조정의 정책은 황제와 각부 장관의 협의로 결정하고 집행됐다. 언관인 도찰원(都察院)의 간언 기능도 동결됐다. 사대부의 상서도 거의 없었다. 옹정제(雍正帝)의 『어제붕당론(御製朋黨論)』에 의해 당파도 결성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강유위(康有爲)를 비롯한 청말 개혁가들에 의해 사대부적 정치문화가 활성화될 때까지 이런 상태는 계속됐다.

정옥자 교수는 “조선이 중화라고 생각한 것이 조선 후기 명이 망하고 청이라는 오랑캐가 등장할 때”라며 “오랑캐는 종족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무력으로 남을 침략, 약탈하고 괴롭히고 빼앗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일본은 18세기까지 사무라이 사회였지만 18세기 말 이후 다른 유형의 사무라이가 등장한다. ‘독서하는 사무라이’ ‘칼 찬 사대부’다. 이들의 등장은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유학의 급속한 확산에 힘입었다. 사무라이와 그 자제들은 급격하게 늘어난 번교(藩校)·사숙(私塾)·스터디그룹(勉强會) 등 각종 교육·학습기관에 다니면서 학문을 익히고 인맥을 만들어 갔다. 이런 흐름은 사무라이의 정치화를 촉진했다. 이전에는 ‘결당(結黨)의 금(禁)’ ‘월소(越訴)의 금’이라고 해서 당을 만들거나 상소를 하는 게 금지돼 있었다.

사무라이의 새로운 학문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학문 실력과 리더십이 중시됐다. 널리 퍼진 회독(會讀)이라는 학습 방법은 정치토론의 장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천하국가를 우려하는 사대부적 ‘우환(憂患)의식’을 갖고 있었다. 당도 만들었고 ‘붕당적 조짐’도 나타나 스스로를 ‘정의당(正義黨)’, 상대방은 ‘속론당(俗論黨)’ 등으로 부르기까지 했다.

조선과 청의 정치 엘리트들이 크게 위축된 시기에 일본 사무라이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은 것이다. 전에는 엄격하게 금지됐지만 이젠 정치현안에 대한 상서도 빈번히 올릴 수 있었다. 전에는 어른거리지도 못했지만 이제는 번주의 어전회의에 참석해 의견을 피력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언로의 활성화를 위해 언관의 설치를 주장했다. 나아가 군주 친정(親政)을 요구했다. 기존의 소수 합의체제를 해체하고 일반 사무라이가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려 한 것이다. 조선의 선비 시스템과 유사하다.

박 교수는 “그러나 이것이 조선과 같은 유교의 활성화를 뜻하지 않는다. 문을 숭상하지만 무를 배척하지 않는 ‘문무양도(文武兩道)’다”라고 지적했다.

가타오카 교수는 “일본의 주력은 힘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사무라이다. 사무라이라고 말로 다스리지 않은 것도 아니고, 선비도 무력을 사용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굳이 나누자면 선비는 문(文), 사무라이는 무(武)”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막부 말기 유학에 영향을 받은 사무라이는 동요와 변혁을 일으키는 동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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