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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칼럼] 탐구할 게 많아서 … 아직도 서양음악 탐닉

중앙선데이 2014.02.23 02:20 363호 27면 지면보기
배호(1942~1971)의 대표곡 ‘돌아가는 삼각지’ 음반. 그의 광팬들은 3B(바흐·베토벤·브람스)에 배호를 더해 ‘4B’라고 한다.
습관적으로 판을 걸어놓고 아련한 잠에 빠졌다. 선잠 속에 엄청난 속주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데 마치 광풍이 몰아쳐 오는 것 같다. 문득 느껴지기를 저것은 록이 아닌가. 록 중에서도 림프 비즈킷(Limp Bizkit) 같은 하드코어 록이라고나 할까. 전주 없이 곧장 차분한 피아노 소리로 시작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인데, 젊은 시절 바렌보임의 지휘로 노대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함께한 오래된 녹음이다. 무섭기까지 한 루빈스타인의 타건에서 망아 상태로 도취의 열광을 보이는 록 기타리스트를 떠올렸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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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정말로 헤비메탈 연주 같은 뮤지션은 글렌 굴드라고 할 수 있다. 멜로디 라인이 거의 없는 메탈곡을 즐기는 포인트는 반복되는 리프(riff)를 따라가는 것이다. 글렌 굴드의 바흐 연주가 대부분 그런데 특히 영국 조곡에서는 동일한 패턴을 반복 또 반복하면서 조금씩 변형시켜 나가는 묘미가 그만이다. 무슨 소린가 싶다면 가령 주다스 프리스트의 브레이킹 더 로(Breaking the Law)의 리프 부분과 굴드의 연주를 비교 시청해 보라. 아이언 메이든의 곡도 좋다. 짐작컨대 글렌 굴드는 헤비메탈의 속성을 본능적으로 체득한 것이 아닐까 싶다.

가요를 부르는 것 같은 클래식 연주자들도 있다. 슈만의 첼로 소품들을 연주하는 미샤 마이스키를 들으면 애절한 가요를 노래하는 것 같다. 가요란 대중성이라는 이름의 통속성이 꼭 필요한 법인데 미샤 마이스키에게 항상 그런 의도가 느껴진다. 피아노를 가요처럼 연주하는 인물은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다. 주특기인 쇼팽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무거운 베토벤 소나타나 난삽한 프로코피예프 곡조차 아슈케나지는 절절한 꺾기를 보여준다. 본인들이야 그런 말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판소리 명창 임방울(1904~1961).
언제부터인가 두려워진 것이 있다. 배호나 임방울을 듣게 될까 봐서. 고전음악의 난바다를 헤치며 한평생 살아온 음악광들도 나이를 먹으면 한결같이 옛 가요나 우리 전통국악이 좋아서 미치겠다고 빠져든다. 엄청난 오디오 기기를 쌓아놓고 늘 배호, 김광석, 이은미만 틀어대는 ‘대가’를 만난 적도 있다. 왜 남의 나라 음악을 숭배하느냐면서 이화중선·임방울의 창에 열광하고 김죽파·황병기 가야금의 예술성을 논한다. 좋아서 좋다는데 뭐라 할 일은 아니지만 예외 없이 고집스러워지는 노인증세를 동반한다. 세월이 좀 더 흐른 다음에 나 역시 왜 배호를 모르고 판소리를 몰랐던가 하고 탄식하는 반성문을 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다. 누구나 반발하고 심지어 손가락질까지 할지 모르지만 우리 음악이라는 가요와 국악에서는 탐구적 열정이 생겨나지 않는다. 기방(妓房)을 원천으로 하는 국악이나 쇼 비즈니스의 산물인 가요에서 음악의 광휘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팝, 록, 재즈와 우리 음악의 관계는 어떨까. 나는 아직도 대중음악으로는 팝을 듣고 록 음반을 사고, 30대 시절 10여 년간 오직 재즈만 들었던 체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음악 속에는 엄청난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마 좀 더 익숙하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얼마 전 코언 형제의 신작영화 ‘인사이드 르윈’을 극장에서 봤는데 집도 없이 떠도는 포크 뮤지션 르윈 데이비스의 고군분투를 보면서 직감이 왔다. 저거 데이브 반 롱크를 그린 것 아냐? (나중에 찾아보니 맞았다) 덩치가 산만 한 롱크는 1960년대 초반 뉴욕의 포크뮤직타운 그리니치빌리지의 터줏대감 같은 인물이다. 애석하게도 노래를 잘 못 부르는 것이 그의 특징인데 포크를 좋아한다면 일단 그를 대접해 줘야 한다. 포크정신 그 자체를 구현한 존재니까. 희귀해서 꽤나 고가를 치르면서 그의 음반을 사 모으던 기억이 난다.

외국에서 살아본 적조차 없는 나의 이 같은 양풍 열광, 영미와 유럽 선망은 낫지 않는 증세다. 그러나 낫고 싶지 않다. 그 음악들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우리 음악이 더 좋아지는 현상은 탐구적 태도가 즐기는 자세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런데 “캬, 배호 너무 좋아!” 하는 내 또래 중늙은이들이 왜 그리 싫을까.

최근에 젠센과 보작, 두 종의 스피커를 내보내고 JBL 하크니스를 새로 들였다. 같은 JBL의 최고급기 하츠필드가 이미 있는데 왜 또 형제뻘 스피커를 들이느냐고 하면 대답이 궁색하다. 하지만 하츠필드와 하크니스는 성씨만 하씨일 뿐 다른 시스템이다. 같은 백로드 방식이어도 저역대 탄성과 질감이 다르다. 그런 것이다. 아직은 하염없이 궁금한 것이 많다. 참, 지휘자 아바도가 작고했는데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민속적으로 향불이라도 피워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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