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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인생의 단순한 진리

중앙선데이 2014.02.23 02:22 363호 27면 지면보기
안경을 쓰고도 안경을 찾는 날이 있다. 그럴 땐 순간적으로 ‘내가 지금 뭐 하지’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서 자신을 아는 것이 수행이고 또 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만큼 인간은 밖으로 바라보는 시간과 생각이 많다는 뜻일 게다.

지난해 여름 지인과 중국에 간 적이 있다. 만리장성에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을 때였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사진 찍기에 바쁘다 보니 지인은 모자 위 선글라스가 성 밑으로 떨어진 것도 몰랐다. 다행히 내가 그 순간을 목격해 성 밑까지 내려가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그는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식사 자리에서 가이드가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중국에서는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그릇의 이가 살짝 깨진 것을 내놓는단다. ‘당신을 오래된 그릇처럼 편하게 모십니다’라는 뜻이란다.

즐겁고 풍요로운 만찬이 이어지던 중 30년 넘게 결혼 생활을 해온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안사람이 키만 조금 컸더라면….” 그러자 그의 아내가 바로 말을 받았다. “무슨 소리야, 내가 조금만 컸다면 당신하곤 만나지도 않았어.” 모두들 크게 웃었다. 그랬다. 아무리 잉꼬 같은 부부라도 서로에게 만족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 다 비슷하구나’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최근 한 선배가 책을 냈다고 하길래 서점에서 한 권을 구입했다. 퇴근해서 조명을 낮게 하고 가만히 글을 읽다 보니 책의 두께만큼 그의 삶도 두꺼웠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선배는 결혼한 뒤 교단의 명령에 따라 전국을 돌며 법회를 열었다. 선택권도 없이 ‘견우와 직녀’ 신세가 돼버린 그의 아내도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사람”이라며 남편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삶에 차츰 면역이 됐다고 한다.

그러길 20여 년. 어느 날 집에서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그날 따라 아내 목소리가 심상찮음을 느낀 그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종합병원에서 검진을 받게 했다. 결과는 유방암 4기. 순간 맥이 풀리고 살아온 세월들이 안개 낀 날처럼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더란다. 담당 의사에게 매달렸지만 이미 암 세포가 몸 곳곳으로 전이돼 수술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다. 월세와 전세로 무려 스무 번 넘게 이사를 다니며 무능한 남편 노릇만 했는데…. 하지만 그의 아내는 결국 1년 뒤 세상을 떠났다. 아내의 임종 때도 교단 일에 쫓겨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그는 그때의 아픔을 파노라마 영상처럼 적어 나갔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문득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누구나 아픈 한 짐을 지고 있구나. 어느 가정이나 한 가지 괴로움을 끌어안고 있구나. 어느 나라나 한 가지 운명적 갈등은 갖고 있구나.

지리산 달궁 고갯길을 넘으며 태풍과 비바람에 소나무들이 통째로 꺾인 모습을 보았던 지난해 종주길에서 나는 여실히 자연의 고통과 마주쳐야 했다. ‘하늘도 무심하다 싶었는데 실은 자연도 상처와 아픔을 끌어안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 건강하긴 한데 돈이 부족하다는 사람, 혹은 돈은 있는데 건강이 따르지 않는다는 사람을 만날 때의 느낌도 비슷했다.

하나가 좋으면 하나는 좋지 않음이 삶의 운명 같다는 생각도,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놓으라는 평소 생각도 더욱 간절하게 다가왔다. 직위가 높은 자리에 있어도 그만큼의 걱정이 있을 터. 타인이 보기에 행복한 듯싶어도 보이지 않는 고통은 있기 마련일 게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무게만큼 짐을 지고 꿈도 꾸게 되나 보다.



정은광 원광대학교 미술관 학예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수행과 선그림(禪畵)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마음을 소유하지 마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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