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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벌일지 모를 인물” … 천샤오콴 경계하는 장제스

중앙선데이 2014.02.23 02:30 363호 29면 지면보기
1945년 9월 9일 오전 9시, 일본군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기 위한 의식에 국방부장 허잉친(何應欽·가운데)과 함께 중국전구(戰區)를 대표해 참석한 해군총사령관 천샤오콴(오른쪽 둘째). [사진 김명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영국에 체류 중이던 천샤오콴(陳紹寬·진소관)은 함정에 비행기가 있는 것을 보고 눈이 번쩍했다. 본국에 보고서를 보냈다. “배 한쪽에 갑판을 붙여놓고 비행기를 싣고 다니는 것을 봤다. 우리도 만들 수 있다. 해양 대국이 되려면 잠수함도 건조해야 한다.” 북양정부는 묵살했다. 천샤오콴은 잠수함을 한 척 구하기 위해 독일로 달려갔지만 영국 측의 방해로 실패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62>

천샤오콴은 북양정부에서 승승장구했다. 1926년 국민혁명군을 결성한 남방의 국민정부가 북양정부 타도(북벌)를 선언했다. 북양정부 제2 함대 사령관 천샤오콴은 장강(長江) 하류에 방어선을 설치했다. 이 일대는 군벌 쑨촨팡(孫傳芳·손전방)의 통치구역이었다.

천샤오콴은 직속상관의 명령을 따를지, 국민정부에 귀순할지를 놓고 심사숙고했다. 함대를 이끌고 국민혁명군에 가담했다. 룽탄(龍潭) 전투에서 쑨촨팡의 주력을 궤멸시켰다. 국민정부는 1등 훈장과 ‘中流砥柱(황하의 풍랑 한가운데 꿋꿋이 서있는 기둥)’라는 네 글자가 선명한 깃발로 보답했다.

북방을 평정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제2함대 사령관을 교체하지 않았다. 항공모함을 만들자는 천샤오콴을 직접 불러서 달랬다. “경제 개발과 공산당 소탕을 병행해야 한다. 항공모함 건조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면 민심이 우리를 등진다. 네가 제출한 계획안은 보류시키겠다. 5년도 좋고 10년도 좋으니 더 큰 빵 덩어리를 빚어 봐라. 굽는 건 내가 하겠다.” 듣고만 있던 천샤오콴은 잠수함이라도 만들자고 제의했지만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청일전쟁 직전, 영국 교관과 함께한 북양함대의 지휘관과 수병들.
장제스는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사람”이라며 천샤오콴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해군의 동향을 파악하느라 집무실을 떠나지 않았다. 지휘관 중에 천샤오콴의 고향인 복건(福建) 출신이 많은 것을 보고 경악했다. 동북(東北)과 광동(廣東)쪽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자 천샤오콴을 장쉐량(張學良·장학량)에게 파견했다.

베이징에서 동북의 지배자 장쉐량을 만난 천샤오콴은 해군의 지휘권을 통일시키자고 제의했다. 장쉐량은 동의했다. 장제스는 광동 지역의 해군도 천샤오콴을 내세워 정리했다. 광동 해군도 천샤오콴의 설득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타고난 군인정치가였다. 천샤오콴을 해군부장에 임명했지만, 제 손으로 해군 인재를 양성하기로 작정했다. “북양해군과 남양해군을 뿌리를 뽑아버리겠다”며 장쑤(江蘇)성 장인(江陰)에 해군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겸임했다.

해군부는 간판만 요란했다. 1년 예산이 장제스가 교장인 해군학교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실망한 천샤오콴은 악조건 속에서도 함정 건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928년부터 37년까지 10년간, 7척의 군함과 10척의 어뢰정을 건조하고 구닥다리 함정 13척을 신형으로 개조했다.

천샤오콴은 항공모함과 잠수함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중앙방송국에 나가 항공모함과 잠수함 건조가 해군의 목표라며 정부를 압박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장제스는 영국에 있던 천샤오콴을 해군총사령관에 임명했다. 황급히 귀국한 천샤오콴에게 강을 따라 북상하는 일본군 대부대를 저지해야 한다며 장강 방어를 당부했다. 천샤오콴은 하룻밤 새에 수십 척의 상선을 징발해 강을 막아버렸다. 비행기와 강력한 후방 지원을 받는 일본 제3함대와는 애초부터 되지가 않는 싸움이었다.

적기의 화력에 노출된 중국해군은 중기관총과 고사포로 맞섰다. 전투는 1개월간 계속됐다. 적기 몇 대를 격추시키고 중국해군은 전멸했다. 전쟁을 참관한 독일 고문이 훗날 묘한 기록을 남겼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격렬하고 괴상한 해전이었다. 일본군 800명과 중국군 3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천샤오콴은 북양수사에서 시작된 구 중국해군의 씨를 말려버리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일본군의 북상을 한 달간 저지하며 중국해군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만천하에 노출시켰다.”

독일인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1943년 11월, 천샤오콴은 ‘신 해군건설 계획안’을 장제스에게 제출했다. “4개 해군 군구를 신설하고 항공모함 20척을 건조하자. 한 척당 18억원이면 가능하다.” 장제스는 거절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천샤오콴은 계획안을 수정했다. 20척을 12척으로 줄였다. 내전을 준비하던 장제스는 계획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겨울이 되자 중공군이 동북으로 이동했다. 국민당 군사위원회는 천샤오콴에게 발해만을 봉쇄하라고 지시했다. 천샤오콴은 군함을 이끌고 출항은 했지만 타이완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장제스는 병력을 동원해 해군총사령부를 없애버렸다. 난징으로 돌아온 지 10일 만에 천샤오콴은 파면당했다.

젊은 시절, 영국 체류 중 부인을 잃은 천샤오콴은 재혼을 하지 않았다. 홀몸인 제수와 조카들을 데리고 귀향했다. 짐은 책 보따리 30개가 다였다. 장제스가 전략고문 임명장과 돈을 보냈지만 거절했다. 내전에 패한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가자며 사람을 보냈을 때도 대문을 닫아걸고 만나지 않았다.

신중국 설립 후 천샤오콴은 각별한 보호를 받았다. 문화혁명 시절에도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지시로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국방위원회 위원, 전인대 대표, 성 부주석 등을 역임했지만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69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오쩌둥에게 그간의 보살핌에 감사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타이완에 있는 옛 친구들과 부하들에게도 조국통일에 전념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천샤오콴의 이름을 딴 항공모함이 등장하기를 바라는 중국인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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