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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칼럼] 경주 참사는 기후변화의 역습

중앙선데이 2014.02.23 02:37 363호 30면 지면보기
설국(雪國)은 잔인했다. 꽃다운 부산외국어대 학생 9명 등 10명의 생명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부실시공이나 안전불감증 등 여러 원인이 거론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수분을 잔뜩 머금은 10t트럭 10여 대 무게의 눈이 건물 지붕을 짓누른 데 있다.

참사가 발생한 17일 아침으로 돌아가 보자. 새벽에 출근한 리조트 직원은 눈이 쌓인 산기슭의 설경을 보며 어떤 낭만적인 상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경주에선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던 터라 며칠 계속된 눈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들의 눈길은 아마도 건물의 아래쪽인 도로에 쏠렸을 것이다. 리조트를 찾는 손님들의 차바퀴가 눈길에 미끄러질 수 있는 상황이어서다. “습설(濕雪)의 무게가 일반 눈보다 세 배나 무겁다”는 잦은 언론 보도도 직원들의 시선을 위쪽, 즉 건물 지붕 쪽을 향하게 하진 못했다. 기후변화에 따른 이상기후의 ‘파괴력’이 이들의 머릿속엔 입력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주의 눈’이란 이상기후의 위력을 인식했다면 도로보다 지붕 위의 눈을 먼저 치우지 않았을까.

우리가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 성·연령·경제력·직업·인종·기후 등 다양한 파라미터(parameter, 매개변수)를 고려한다. 여기에 이제 기후변화란 파라미터를 추가해야 한다. 우리 삶에 기후변화가 이미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다. 사람들은 기후변화라고 하면 과거엔 제주에서만 자라던 귤이 남해안에서 재배되는 광경을 흔히 떠올린다. 실제로 기후변화는 세계의 농업지도를 바꾸고 있다. 영국은 와인의 불모지로 통했지만 지금 영국산 화이트 와인은 유명하다. 과거에 논농사를 거의 하지 않았던 홋카이도의 쌀이 일본에선 명품 쌀로 자리 잡았다.

“귤·와인·쌀이 어디서 나오든 먹기만 하면 되지 무슨 대수”라고 생각한다면 기후변화에 호되게 당하기 십상이다. 예로 벼 재배 농가의 골칫덩이로 떠오른 애멸구는 기후변화로 인해 한반도에 뿌리를 내린 것으로 의심된다. 2009년 5월 30일부터 나흘간 갑자기 엄청난 숫자의 애멸구가 중국에서 남서풍을 타고 몰려왔다. 과거엔 국내 6월 기온이 애멸구가 번식하기에 부적합했으나 기후변화로 기온이 상승하면서 국내에 정착했다. 해충은 온도가 어느 정도 높아야 잘 번식한다. 애멸구는 2011년 벼 경작지 1만535㏊에 피해를 입혔다. 국내 논 면적이 100만㏊에서 약간 미달하므로 1.5%의 논이 피해를 본 셈이다.

우리나라처럼 곡물 자급률이 20%대인 나라에선 기후변화에 잘 대처하지 않으면 식량위기란 ‘침묵의 쓰나미’를 부를 수 있다. 이상기온 등 기후변화가 심하면 현재 80%대인 쌀 자급률이 5∼10년 내에 50%대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

기후변화는 건강과 안전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전엔 남부 지역에 머물던 털진드기와 쓰쓰가무시병이 최근 서울 등 수도권까지 북상했다. 기후변화는 천식·비염 등 알레르기 질환 발생 위험도 높인다. 기온이 올라가면 나무에서 꽃이 피는 시기가 빨라지고 길어져 꽃가루 생성량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3월 최저기온이 올라가면 4, 5월에 천식·비염 등 알레르기 환자가 예외 없이 증가했다.

기후변화는 눈 폭탄 외에 홍수·가뭄·폭염을 몰고 올 수 있다. 지난해 11월 필리핀을 강타한 태풍 하이옌도 기후변화 탓으로 분석된다. 대재앙 직후 필리핀의 베그니노 아키노 대통령은 “하이옌과 같은 태풍이 더 자주 올 것이며 기후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엔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최근 “기후변화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대량살상무기”라고 경고했다.

기후변화는 얼핏 서서히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조짐들을 무시했다간 우리의 삶 자체가 리조트의 체육관 지붕처럼 10초 만에 V자형으로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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