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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세상탐사] 올림픽의 훼방꾼들

중앙선데이 2014.02.23 02:44 363호 31면 지면보기
올림픽은 내셔널리즘이란 용어에 훨씬 앞선 내셔널리즘의 소산이었다. 올림피아 제전은 원래 그리스 도시국가 중 하나인 엘리아인들만의 잔치였다. 그러다 서로 동맹을 맺으면서 이웃 국가로 퍼져나갔다. 그리스 전체의 행사가 되는 데는 거의 한 세기가 걸렸다.

고대 그리스에서 체력은 전쟁을 위한 필수덕목이었고, ‘더 멀리 더 빨리 더 강하게’는 전사들의 생존기술이었다. 일부 국가에서 성벽을 허물고 우승자를 맞는 뻑적지근한 개선식을 벌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강한 영웅을 가진 만큼 성벽쯤은 없어도 겁나지 않는다는 과시였다.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공식적인 상은 월계관이 전부였다. 하지만 비공식적인 보상은 엄청났다. 많은 도시가 막대한 포상금으로 선수들을 독려하고 우승자에게 평생 연금을 지급했다. 우승자를 바로 장군으로 승진시키는 국가도 있었다. 오늘날의 이종격투기쯤 되는 판크라티온 우승자였던 타소스의 테아게네스의 한 끼 식사로 황소 한 마리가 제공됐다는 것만 봐도 대우를 짐작할 수 있다.

경쟁이 치열해지는 만큼 열광도 더해갔다. 페르시아의 침공조차 경기를 중단시키지 못할 정도였다. 영화 ‘300’에 나오는 소수의 그리스 병사들이 테르모필라이에서 크세르크세스의 대군과 맞서는 동안 수천 명의 그리스인은 테아게네스가 월계관을 쓰는 모습에 환호했다.

내셔널리즘이 무르익은 19세기 말 부활한 근대 올림픽 역시 내셔널리즘의 요람에서 태어났다. 창시자인 쿠베르탱 남작은 좀 모호한 인물이었다. 독일을 공공연한 적으로 가르치는 교육에 반발하면서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조국 프랑스가 패한 이유를 체력의 열세 탓이라 믿었다.

영국의 국력이 활발한 학교 체육에서 비롯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영국 시스템을 도입하려다 보수적인 프랑스 체육계에 가로막히자 새로운 출구를 모색한 것이 근대 올림픽이었다. 스포츠 교육을 통한 국력 신장을 생각하면서 스포츠를 통한 세계평화 추구라는 올림픽을 구상한 것이다.

이런 모호함 탓인지 올림픽은 그동안 ‘말 따로 행동 따로’의 연속이었다. 참여를 통한 인류 화합보다는 국가 간 메달 경쟁에 불꽃이 튀었다. 냉전 시대에는 갈린 편에 따라 상대 진영이 주최하는 올림픽을 보이콧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올림픽 신화를 새삼 살펴본 이유는 이처럼 내셔널리즘의 안개가 짙게 드리운 올림픽 경기를 이제 곧 보지 못하게 될지 몰라서다. 올림픽 경기에서 국가색(色)이 갈수록 옅어지고 있는 까닭이다. 올림픽뿐만 아니라 스포츠 자체가 그렇다. 스포츠 선수들은 물론 관중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 운동선수들이 국가의 명예를 걸고 뛰었다면 이제 자신의 명예를 위해 국적을 바꾸는 게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 워싱턴포스트는 안현수를 예로 들며 이런 ‘패스포트 올림피안’들이 앞으로 넘쳐날 것이라 전망한다. 올림픽은 아니지만 올해 호주 오픈 여자 테니스 우승자인 중국의 리나도 “내가 국가를 위해 뛴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날 위해 테니스를 친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예전 같으면 ‘배신자’ 소리가 절로 나왔을 대중도 호의적이다. 김연아의 열광적 팬들은 “그녀의 유일한 약점은 대한민국 국적”이라고 말하는 데 서슴지 않는다.

“조국 없이 리나의 성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보도에 중국 네티즌들은 “맞다. 조국이 없었으면 그녀가 서른한 살에 챔피언이 될 순 없었다. 스물한 살에 우승했을 것”이라고 비아냥댄다.

이런 탈(脫)내셔널리즘 움직임의 중심엔 물론 젊은 층이 있다. 그렇다고 경기침체와 세대갈등의 반작용 때문만은 아니다. 모바일 정보혁명이 보다 큰 원인이다. 과거와 달리 요즘 젊은 세대는 자국 경기 위주로 중계하는 지상파TV에 시청을 강요받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손바닥 안에 좋아하는 선수, 관심 있는 종목, 세계 최고 수준의 경기를 내려 받아 즐긴다. 그들이 A매치보다 화려한 플레이의 메이저리그·NBA·프리미어리그에 열광하는 건 이미 오래된 얘기다. 올림픽에서도 그들은 자국 선수보다 잘하는 외국 선수에 갈채를 아끼지 않는다.

오른 눈높이를 애국심으로 낮추긴 어렵다. 어느 한 나라를 대표해야 출전할 수 있는 올림픽에서 내셔널리즘의 퇴출 속도가 가팔라지는 이유다. 이번 소치 올림픽에서 보듯 편파 판정을 일으키는 개최국 텃세는 이런 변화를 읽지 못하는 구태요, 흥미 반감(半減)과 관중 반감(反感)만을 초래하는 악습일 뿐이다. 국적보다는 기량에 박수를 보냄으로써 화합이라는 올림픽 근본 취지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막는 훼방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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