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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Sunday] 연아의 마지막 선물은 ‘성찰’

중앙선데이 2014.02.23 02:46 363호 31면 지면보기
21일 새벽녘 김연아 선수의 올림픽 경기를 본 뒤 불현듯 26년 전 서울 올림픽이 떠오른 건 괜한 오지랖인지 모르겠다. 직전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84년 LA 올림픽이 반쪽짜리 올림픽이었던 것에 비해 88년 서울 올림픽은 12년 만에 이념을 뛰어넘는 동서 화합의 자리였다. 개최국 대한민국 역시 놀라운 성적을 내고 있었다. 이른바 ‘스포츠 강국 빅3’라는 소련·동독·미국에 이어 4위 자리를 넘볼 정도였다. 분단국·주변국 이미지를 단박에 씻으려는 듯 무섭게 달려들었다.

사달이 난 건 폐막일 전날이었다. 그때까지 금메달 11개로, 하나만 더 따면 서독·헝가리를 제치고 4위를 확정 지을 수 있었던 우리가 마지막 기대를 한 종목은 복싱이었다. 박시헌 선수가 라이트미들급 결승전에 올랐다. 아쉽게도 유효타수 등에서 확연히 밀리며 경기 내용은 상대방 미국 선수의 우세였다. 하지만 최종 판정은 3대 2 대한민국의 승. 주심이 자신의 손을 들어올리는 순간, 기뻐하기보다 어리둥절해하는 박시헌 선수의 표정은 두고두고 화제였다. 덕분에 대한민국 역시 올림픽 4위에 등극할 수 있었다. 경기 직후 “이거 너무 속 보인다”라는 자성이 있긴 했지만, “어디나 홈 어드밴티지는 있는 거 아니야”라는 반론에 묻혀 논란은 사그라지고 말았다.

어쩌면 김연아는 쇼트 프로그램 점수가 나왔을 때 이미 직감했을 것이다. 이번 올림픽에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것을. 프리 스케이팅에서 개최국 러시아 선수가 149점을 받았을 때, 우리 국민 대다수는 ‘김연아가 한 번만 삐끗해도 금메달 못 따는 거 아니야’라며 가슴을 졸였겠지만, 정작 본인은 그때 짐작했을지 모른다. 내가 완벽히 연기한다 해도 저 점수를 ‘그들’이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최선을 다한다 해도 결과가 뻔하다는 것만큼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게 있을까. 더구나 승패가 절대적인 스포츠에서. 그럼에도 김연아는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러니 경기 직후 뭐라고 형형하기 힘든, 세상을 초탈한 듯한 표정을 지은 것 아니었을까.

김연아의 은퇴 무대, 우리는 둘 중 하나를 그려보곤 했다. 화려한 연기로 2연패의 금자탑을 이룩하든, 아니면 상상하기 싫지만 안타까운 패배로 고개를 떨구든. 오직 이기고 지는 것에만 촉각을 세웠다. 하지만 김연아는 클린 경기를 펼치고도 2위에 머물러 우리의 예상 시나리오를 보기 좋게 뒤엎고 말았다.

대신 되짚어 보고 곱씹어 봐야 할 고민을 우리에게 툭 던져놓았다. 타인의 불공정함을 탓하기 앞서 혹시 우리 안의 편파성은 없었는지. 억울하고 부당해도 때론 그걸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며, 비록 실패하더라도 현재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밖에 없는 부조리함이 있음을. 미리 짜놓은 각본과 같은, 짜릿한 승리와 감동의 드라마를 원한 관객에게 김연아가 준 마지막 선물은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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