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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별따기, 이산가족 상봉

중앙선데이 2014.02.23 02:47 363호 31면 지면보기
소치 겨울올림픽이 한창인 가운데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2010년 이후 처음으로 열렸다. 한반도 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퍼져 있는 한국계 사람들에게 6·25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82명의 어르신들이 이북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만났다.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고 울고 웃고 먹고 포옹하는 가운데 한이 조금이나마 풀렸기를 빈다.

그나마 이렇게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운이 좋은 분들이다. 내 가족을 포함한 많은 이산가족에게 그 기회를 잡는 건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렵다. 대기자 명단엔 7만2000명이 넘는 이들이 이름을 올렸다. 한국 외의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이민자들은 포함하지 않은 숫자다. 미국에 살고 있는 내 외갓집 식구들처럼 말이다. 아마 우리 식구들은 그 기회를 영영 잡지 못할 것이다. 평균 수명이 늘고는 있다지만 이산가족의 대부분은 80세를 훌쩍 넘겼다. 그들에게 시간은 더 빨리 흐른다. 그리고 한반도 정치 지형은 수십년째 제자리걸음이다. 내 외갓집 가족을 포함한 이산가족들에게 38선 이북은 우주의 화성보다도 먼 곳이다.

이산가족 상봉에 관한 뉴스를 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외할아버지 생각이 나서다. 이북에 남겨진 가족을 두 번 다시 못 보고 돌아가셨다. 미국에 살고 있는 어머니나 이모는 “이산가족 상봉에 당첨될 확률은 거의 없겠지”라고 말씀하신다.

1948년 어느 날 밤. 외할아버지께서는 고향인 평안남도 양덕을 떠나셨다. 한밤중이었다. 광복 후 정치 상황이 계속 어지러웠고, 외할아버지는 고향을 떠날 결심을 하셨다. 어린 아이 5명과 나의 외할머니와 함께 인천 앞바다를 거쳐 서울에 가까스로 도착하셨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겐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했다. 아마도 곧 인사를 드릴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하셨을 것 같다. 하지만 얼마 후 6·25가 터졌고, 휴전선이 그어졌다.

내가 처음으로 이산가족 상봉 방송을 본 건 2000년이다. 그때부터 역사적인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질 때면 꼭 텔레비전에서 관련 뉴스를 챙겨봤다. 이북에 있는 외갓집, 가본 적도 없는 그곳을 난 언제쯤 가볼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서다. 아마도 절대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이산가족 모두가 가슴에 큰 응어리와 한을 품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가족이란 건 어떤 형태로든 아픔이 있다. 하지만 불가항력으로 가족을 아예 만날 수 없는 건 너무 가슴 아픈 일이다.

이런 가족사의 비극으로 인해 난 학부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정치학을 각각 공부했다. 언젠가 남북통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공부를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항상 내 머리와 마음속에 있다.
혹시 미국의 가족이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문의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한국에 거주하지 않는 이상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특히나 가족들이 생존해 있는지 알 수도 없기 때문에 더 어렵다고 했다.

서울대 대학원 시절 “북한 아리랑 축제에 다녀왔다”는 몇몇 미국인·캐나다인 학교 친구들의 말을 듣고선 직접 2002년 축제에 다녀왔다. 중국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를 오르기 전 고려여행사 대표가 경고했다. “만약 북한에 가족이 있다고 해도 누구에게 물어본다거나 찾으려 하면 바로 추방”이라고. 하기야 이북의 외가인 ‘고부 이씨’ 집안을 찾는 건 어려울 터다. 혹여 찾을 수 있다고 해도 주체사상에 물든 가족들이 미국에서 자란 나를 얼마나 반겨줄지도 의문이다. 아마 나를 ‘미 제국주의에 물든 나쁜 사람’으로 여기진 않을까.

하지만 그래도 만나야만 한다. 한국의 IT 기술은 최고 수준이다. 영상채팅도 있지 않은가. 한국의 올림픽 금메달도 값지지만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 역시 그만큼 값지다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 



수전 리 맥도널드 미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학사를, 하버드대에서 교육심리학 석사를 받았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한국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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