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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수저·망치·바퀴와 같아 … 더 나은 것 발명할 수 없다

중앙일보 2014.02.22 00:20 종합 20면 지면보기
서울 합정동 ‘정병규 학교’의 교실은 모두 책의 바다다. 평생을 활자와 책의 바다에 빠져 산 정병규씨는 “나도 책이다”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500년 동안 책이라는 물건의 형태에는 이런저런 변화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기능과 구성 체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책은 수저나 망치나 바퀴, 또는 가위 같은 것입니다. 일단 한 번 발명되고 나면 더 나은 것을 발명할 수 없는 그런 물건들 말이에요. 수저보다 더 나은 수저는 발명할 수 없습니다. (…) 책은 자신의 효율성을 이미 증명했고, 같은 용도의 물건으로서 책은 바퀴와도 같은 것입니다. 일단 한 번 발명되고 나면, 더이상 발전이 불필요한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어요.

내 마음의 명문장<7>북디자이너 정병규



- 움베르토 에코(1932~ )의 대담집 『책의 우주』 중에서



세계적 기호학자, 우리에게 이윤기의 명역인 『장미의 이름』과 숀 코너리 주연의 동명 영화로 더 친숙한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의 이 말은 책의 종말론에 대해 “이제는 그런 말을 그만 좀 하자”고 하는 듯하다. 에코와 장클로드 카리에르의 대담집인 『책의 우주』의 앞쪽에, 그것도 ‘책은 죽지 않는다’는 제목을 달고 있는 권두 대담을 펼치자마자 바로 만날 수 있는 말이다. 나비처럼 날아가서 벌처럼 쏘는 재치와 통찰력이 역시 에코답다고 무릎을 치게 했다. 이렇게 간명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을….



 지난 20세기 중반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흉흉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책의 종말, 책의 죽음이 그 소문이다. 책의 종말설을 유포한 장본인은 마셜 맥루한(1911~80)이다. ‘텔레비전 대중화가 몰고 올 새로운 전자문명의 시대가 전격적으로 도래하고 있고, 구텐베르크 은하계는 사라질 것이다’라고 그는 활자문화의 종말을 예언했다. 활자문화가 사라진다면, 따라서 책의 종말은 불을 보듯 뻔한 결론이었다. 1964년의 일이었다.



 당시 우리로서는 5·16의 시대였으므로 책의 종말론쯤이야 강 건너 불이었다. 책의 종말은 거의 해외 토픽 수준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70년 중반 아이로니컬하게도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이 한국 출판의 단행본 시대를 열었고, 그 즈음 나는 북 디자인을 생업으로 삼기 위해 전업했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맥루한이라는 이름과 함께 책의 종말론은 내게 큰 걱정거리로 자리 잡았다. 정말로 책의 운명이 종말로 치닫는다고 한다면 내가 걱정한다고 대세에 무슨 영향이 있을까 하면서도.



 퍼스널 컴퓨터가 일상화되자 책의 종말 담론은 본격적으로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e북이 새로운 상품으로 선보이자 책의 종말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대결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e북 제작 전문회사가 설립될 때, 참여와 지분을 놓고 일부 우리 출판인들끼리 낯을 붉히기도 했었다. 그만치 책의 종말론이 우리 피부에 당시에는 와 닿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내놓고 보면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에코와 카리에르는 『책의 우주』에서 책의 종말에 대한 그간의 담론들을 정리하고 책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요모조모, 조목조목 평이하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펼친다. 무엇보다도 책의 운명이 출판업의 미래와 동일시되어 버린 저간의 근시안적 논의의 장을 확 열어젖힌다. 책의 문제가 보다 넓고 깊은 인류 문화의 영역과 차원에서 살펴져야 한다고, 책의 존재감과 책의 의미에 대해 일깨워주는 점이 새삼스럽게만 느껴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책과 e북, 문자문화와 영상문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논하면서 많은 사실과 전제들을 은폐해 오고 있다.



에코는 말한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정보 전달 수단으로서 이 책만큼 효율적인 발명품은 아직 없었습니다. 수백 기가바이트 용량의 컴퓨터라 할지라도 반드시 전원에 연결돼야만 하지요. 하지만 책에는 이런 문제점이 없습니다.”



 매일매일 일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이 평범한 책의 특성이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논하면서 얼마나 쉽게 무시되는지. 학술적인 논문투의 논의에서 대부분의 논자들은 협의나 한 듯 책의 이 특징은 아예 은폐하기 일쑤다. 물론 책의 독자들도 그렇기는 마찬가지다.



에코가 말한 500년 이전 그때는 물론 구텐베르크의 활자 발명 시기를 말한다. 그 이후 책은 독점적 근대적 제도로서 무소불위의 권위와 권력을 누려 왔다. 디지털 문화가 일상화되기 전까지 감히 어떤 미디어가 책에 맞설 수 있었던가. 책이라는 제도의 폭력성과 그 한계에 대한 철학적 반성과 질타가 20세기 중반 이후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언어적 전회 이후 언어의 불가능성, 문자의 한계, 도구적 이성에 대한 공격 등등.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하나같이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주장을 책이라는 제도, 저서를 통해 말하고 있다.



또 그들은 하나같이 책을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가 문자뿐임을 당연시하고 있다. 책에는 사진·그림·도표가 한 장도 없다고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활자문화와 영상-이미지 문화를 대립적으로 논할 때 책의 다양한 구성 요소, 오늘날 책의 콘텐트 모습들은 철저히 은폐된다. 신문도, 잡지도 보지 않는 모양이다. 철학자들은 그들이 집단적으로 질타하고 있는 이분법 속에 스스로 갇혀서 사유의 놀이를 하고 있다. 철학 책에 처음으로 도형을 도입한 것은 앙리 베르그송이라고 버트런드 러셀은 그의 『서양철학사』에서 말하고 있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1896)에는 서양철학사상 최초로 5장의 도형이 등장한다.



책의 오늘과 내일을 말하는 자리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손의 존재다. 손은 이제 책의 존재 구성 요소다. 손과 관계를 떠나서 책이라는 것 자체는 성립할 수 없다. 책은 그 자체로 완결된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책은 ‘책-손’이라는 ‘관계적 존재’다. 책의 종말론 때문에 우리가 깨달은 가장 값진 사실은 바로 이것이다. 책은 ‘종이 위에 활자가 인쇄된 물체’라는 단순 정의는 지금 수정 중에 있다. 새로운 책의 정의로부터 책과 활자 문화를 동일시하는 태도를 끝내야 한다. 감각기관의 교대 현상이라는 인간의 감각 기능, 그동안 은폐됐던 사실이 다시 공론화되고 있지 않은가. 하도 오랫동안 외면당하고 있어서 얼마간은 낯선 사실, 눈으로 만지고, 손으로 본다는 우리의 능력이 그것이다. 공감각의 기반인 시각과 촉각의 교환과 융합의 기능이다.



책은 손으로 보기도 하는 그런 것이다. 새로운 책의 시대가 다시 열리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활자문화와 함께 앞으로의 책과 함께 새롭게 행복할 것이다.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정병규=1946년 대구 출생. 고려대 불문학과를 나와 프랑스 파리 에스티엔 그래픽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1970년대 한국 출판계에 북디자인 개념을 개척했다. 한국 전통미의 특징인 단정하고 따듯한 형태에 근대 유럽의 지적이고 구성적인 디자인 이념을 융화해냈다는 평을 듣는다. 제1회 교보 북디자인상 대상, 한국문화예술상 등을 받았다. 현재 ‘정디자인’과 ‘정병규 학교’ 대표로 일하며 홍익대 대학원에서 가르친다. 작품집 『정병규 북디자인』 『책의 바다로 간다-정병규 북디자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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