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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저녁이 있는' 신세대 병영

중앙일보 2014.02.22 00:16 종합 14면 지면보기



"피부관리에 신경 써요" 이병들 삼삼오오 마스크팩
"다이어트 중이에요" 5시간 훈련 뒤 밥 절반만 먹어











‘두두두두~’ 수십여 켤레의 전투화가 일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경기도 파주 1사단 여우고개대대 장병들이 혹한기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다. 영하의 날씨 속에 81㎜ 박격포를 들고 사격훈련을 마쳤다. 병사들의 얼굴은 붉게 상기돼 있었다. 철모, 방한복, 워커… 장비들을 하나 둘씩 벗기 시작했다. ‘빡세게’ 진행된 훈련 때문인지 땀에 흠뻑 젖은 전투복에선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생활관(구 내무반)에 퀴퀴하고 비릿한 땀냄새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18일 오후 5시30분. 이제부터 훈련을 마친 병사들의 병영생활, ‘저녁이 있는 군대’의 시작이었다.



클렌징 티슈로 위장크림 닦아내



개인용 세안용품 바구니
 “화장은 지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모르십니까!”



 훈련 전 위장크림을 꼼꼼히 바르고 나갔던 나영호 상병은 생활관 한쪽에 앉은 채 클렌징 티슈로 정성스럽게 얼굴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세안제와 물로 씻어내면 피부 속에 침투한 위장크림 찌꺼기들을 완벽하게 제거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이날 훈련에서 81㎜ 포를 오후 내내 들고 다녔던 그의 얼굴은 땀과 위장크림이 뒤섞여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병 생활관에서는 3명의 병사가 옹기종기 모여 마스크팩의 세계로 몰입한 상태였다. 국방부 방침에 따라 2012년부터 일부 부대에서는 같은 계급, 동기끼리 같은 생활관을 사용한다. 마스크팩을 붙인 채로 최다운 이병은 TV를, 서석준 이병은 조정래의 『정글만리』를 읽고 있었다. 입대 전에도 자주 마스크팩을 했다는 손훈희 이병은 “평소 피부관리에 신경을 많이 썼다”며 “수분 공급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병사들의 피부에 대한 관심은 PX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저렴하고 얼굴에 수분을 공급해주는 마스크팩은 PX의 최고 인기 상품 중 하나다. 이날 PX의 마스크팩은 재고 물량 없이 다 팔렸다. 식음료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팔리는 것도 달팽이 점액 여과물이 1600㎎ 들어갔다는 수분 공급용 기능성 화장품이었다.



 복도는 어느새 실내 생활복으로 갈아입은 병사들로 가득 찼다. 병사들이 손에 하나씩 쥔 세면바구니 안은 세면용 폼(foam), 기능성 샴푸 등 각종 제품들로 풍성했다. 박찬익 일병의 세면바구니 안에 있는 품목은 이랬다. ▶토니모리 플로리아 플라워 에너지 폼 클렌저(피부의 촉촉함을 유지하는 기능) ▶해피바스 페이셜 요거트 폼(탄력 있는 피부를 만들기 위한 기능) ▶엘라스틴 데미지 케어 샴푸(모발 탄력을 강화하는 기능) ▶해피바스 로즈 에센스 로맨틱 바디워시(비타민 A·C가 풍부한 로즈오일 성분 포함)….



 비누 대신 세안용 폼을 사용하는 이유를 묻자 박 일병은 “피부 보습효과가 필요해서다. 일반 비누를 사용하면 얼굴이 당겨 힘들다”고 답했다. 다른 병사도 마찬가지. 세면바구니에는 스킨푸드 클렌징 폼, 댕기머리 탈모방지용 샴푸, 온더바디 바디워시 등이 들어 있었다. 병사들이 씻기 시작한 화장실에서 꽃향기가 슬슬 배어 나왔다.



 오후 6시. 저녁식사를 막 시작하려는 윤진우 이병의 식판은 절반가량 비어 있었다. 1m75㎝·100㎏의 체격에 모자라 보였다. 윤 이병은 이날 5시간 가까이 산언덕을 오르내리고 돌아왔다. 부족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윤 이병은 “다이어트 중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생활관에 걸린 인생목표란에도 ‘다이어트!’라고 큼직하게 써 놓았다. 쌀밥의 분량을 입대 전의 2분의 1로 줄였다. 화·목요일 아침(빵 2개)을 먹을 때도 그는 1개만 먹는다.



"반찬만 많이 먹어도 배 부르다”



 윤 이병뿐만이 아니다. 병사들의 식판에 담긴 밥의 양은 대체로 적었다. “반찬만 많이 먹어도 배부르다”는 병사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보고되자 2012년 국방부는 병사들의 하루 쌀 섭취량을 한끼 570g에서 400g으로 줄였다. 그러나 급양관리관 최근우 중사는 “요즘에는 400g마저도 다이어트한다, 몸짱 관리한다는 이유로 다 먹는 병사들이 별로 없다”며 “반찬에도 열량이 충분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식사를 마친 윤 이병은 식기건조대에 자신의 식판을 넣어뒀다. ‘송기석·박찬범·이재혁·배진호…’ 식판마다 병사들의 이름이 빼곡했다. 각자 자신의 전용 식기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앞으로 베개와 베갯잇도 개인 전용으로 보급할 방침이다.



 식사 후 병사들은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한 병사가 리모컨을 누르기 시작했다. 화면에 검은색 시스루 코르셋 상의와 핫팬츠를 입은 여성들이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병사는 화면을 정지시켰다. 걸그룹 ‘레인보우 블랙’의 ‘차차’ 뮤직비디오였다. 주말에 가요 순위 프로그램 시간이면 TV에 가까운 순으로 병장부터 앉는다는 건 옛말이 됐다. 병사들은 언제든 IPTV의 ‘다시보기’ 서비스를 이용해 걸그룹이 나오는 가요 프로그램이나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다. 송기석 이병은 “‘소녀시대’도 나이가 너무 많기 때문에 ‘AOA’나 ‘걸스데이’ ‘레인보우’ 등의 프로그램을 챙겨 본다”고 말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생활관 내 IPTV 등 디지털TV의 보유율은 지난해 29.5%에서 61.6%로 크게 늘어났다. 일부는 TV를 보는 대신 생활관 복도 양편에 있는 전화부스에서 통화 중이었다. 월급용 체크카드인 ‘나라사랑카드’를 전화기에 ‘쓰윽’ 하고 긋더니 통화를 시작했다



 오후 7시30분이 되자 생활관에서 나온 병사들이 분주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여기, 영어공부반 아니었나? 영어공부반이 어디지?” 팔에 두꺼운 토익 참고서를 안은 한 병사가 말했다. 하루 1시간씩 주어지는 자기개발 시간의 시작이다. 매일 1시간씩 각 생활관은 자기개발실로 바뀐다. 그날그날 자기개발 과목을 바꿀 수도 있다.



내무반에서 만화책 보던 병장은 사라져



 영어공부반에서 토익 교재로 공부하던 홍지원 상병의 설명이다.



 “매일 1시간가량 하는데 주말에는 더 할 수 있습니다. 계산해보니 800시간 정도라 제대 전 토익 900점을 넘기고 싶습니다.”



 가수 강산에의 ‘라구요’를 연주하는 기타소리도 들렸다. 악기연주반에서다. 송승섭 상병이 연주하는 기타는 집에서 쓰던 것을 가져온 것이다.



 1사단 공보장교인 김주오 중위는 “자기개발을 위한 물품은 카메라처럼 군 보안상 문제가 있거나 총포류처럼 위험한 것이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모두 가져와 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기개발 시간이 끝난 오후 8시30분, 솔선2 생활관이 내무반 청소를 시작했다. 누구 하나 쉬지 않고 열심히 쓸고 닦기 시작했다. 뭔가 어색했다. 생활관 한쪽 구석에서 반쯤 기댄 채 TV를 보거나 만화책을 읽고 있을 말년 병장의 모습이 안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솔선2 생활관은 병장들만 사용하는 생활관이기 때문이다. 한 손에 빗자루를 든 전용준 병장이 바닥을 열심히 쓸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한구석에서 쉬고 있을 텐데 불편하지 않을까.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관심사를 공유하기 때문에 서로 의지도 되고 조언도 해주고 좋습니다. 요즘은 사회에 나가면 어떤 일을 할지 서로 상의하곤 하거든요.” 모두가 참여한 청소는 금세 끝났다.



 지금도 일부 대학의 체육학과에선 신입생이 말끝에 ‘다·나·까’를 붙여야 한다. 군대식 군기잡기로 논란이 되고 있지만 정작 여우고개대대 생활관 벽에는 다음과 같은 지시사항이 붙어 있었다. “군인다운 말투는 반드시 다·나·까로 끝나야 하는 것은 아님.”



청소를 마친 병사들이 개인 관물대를 정리했다. 조장훈 상병의 관물대에는 미샤 세이프 블록 에센스 선, 과일나라 올리브 핸드크림 등 각종 화장품들이 잘 정리된 채 놓여 있었다. 한쪽 구석에 세워진 두툼한 토익 교재도 보였다.



“전진! 용기1생활관 저녁점호 인원보고….”



 오후 9시50분 저녁점호가 시작됐다. 병사들의 하루 일정이 완전히 끝났다. 내일도 혹한기 훈련이 기다리고 있다. 오전에는 소산지 점령훈련이, 오후에는 사격훈련이 예정돼 있다. 81㎜ 박격포, 60㎜ 박격포, 90㎜ 무반동총 등 각종 화기를 들고 하루 종일 언덕을 넘어 다니려면 휴식이 필요하다. 10분 후 일제히 불이 꺼지고 병사들은 깊은 잠에 빠졌다. 여우고개대대 일대가 고요해졌다.



충분한 휴식, 훈련에 오히려 더 집중



 기자가 군대 생활관에 들어가 본 건 2002년 병장 제대 후 처음이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제대 12년 만에 돌아온 군대 생활관의 모습은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아무리 휴게시간이라지만 생활관에서 이병끼리 누워 팩을 한다? 개인 화장품을 챙겨 쓴다? 군 생활 1년이 지나서야 독서가 겨우 허락됐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었다.



 생활관의 모습이 언제부터 이렇게 달라졌는지는 군 관계자 중 누구도 정확하게 답하지 못했다. 단지 대부분 “3년 전쯤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2012년 도입한 동기생활관 제도가 시작된 때다. 국방부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동기생활관은 2012년 726개에서 2013년 976개로 증가했다. 시행률은 42.5%에서 57.1%로 늘어났다. 대한민국 군대의 절반 이상이 동기생활관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현실이다.



 병사들과 가장 긴밀하게 접촉하는 소대장들은 이런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정민호 소위(여우고개대대 9중대 1소대장)는 “‘자율과 책임’의 문화가 정착해 가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정 소위는 “선임병들의 구타나 폭언이 급감하다 보니 생활관 내 갈등이 감소했다. 또 일과 후 충분한 휴식을 보장해 주니까 병사들의 훈련에 대한 집중도도 훨씬 높아졌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이용준 소위(대대 9중대 3소대)도 “시대가 바뀌었는데 무조건 과거의 관습만 고집하는 것은 병사들의 자발적 동조를 이끌어낼 수 없다. 물론 현재의 제도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훈련과 개인생활의 병립(竝立)이 가능해질 수 있도록 계속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병사들의 모습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 자신감 있고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4년 전 군 훈련 취재를 갔을 때 병사에게 말을 걸면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주눅이 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질문을 해도 “네” “아니요” 혹은 “이병 ○○○”라는 고함소리만 튀어나왔다. 그러나 이날 만난 병사들은 계급 고하를 막론하고 질문을 던졌을 때 비교적 논리 정연한 답변이 나왔다. 휴식시간에 생활관 한쪽 구석에서 정좌한 채 앞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거나 기타를 치거나 운동을 하는 등 열심히 자기개발에 매진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하지만 마냥 긍정적인 시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는 “맹점도 있다”는 의견도 더러 나온다. 이곳에서 만난 한 대위는 “동기생활관이 시작되고 나서 보다 활기차고 능동적인 분위기가 됐다”면서도 “병사들이 과거보다 이기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예를 들어 남들보다 불침번을 한 번이라도 더 서게 되면 예전에는 ‘내가 한 번 더 서면 되지’라며 받아들였는데 지금은 군 생활 얼마 안 한 이병들도 찾아와 항의한다. 그럼 차근차근 설명해줘야 한다”며 “물론 정당한 요구일 수도 있지만 조직이 우선시되는 군이 개인주의화되어 가는 부분은 우려스럽다”고 덧붙였다.



파주=유성운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 기자



사진 설명



손훈희 이병이 휴식시간 동안 마스크팩을 하고 있다. 손 이병은 “진액 한 방울이라도 아깝다”며 팩이 들어 있던 용기를 짜내 떨어지는 액체를 얼굴에 뿌렸다.



송승섭 상병이 집에서 가져온 자신의 기타로 가요 ‘라구요’를 연주하고 있다.



한 병사가 81㎜ 박격 포 비사격 훈련을 앞두고 위장크림을 바르고 있다.



병사들이 유명 브랜드의 세안용품으로 세수를 하고 있다.



박찬범 일병의 관물대는 각종 ‘사제’ 화장품으로 가득하다.



PX의 진열대. 가장 잘 팔리는 제품은 달팽이 진액이 들어간 얼굴 수분 보충제다.



송기석 이병이 IPTV의 ‘다시보기’ 서비스로 걸그룹 ‘레인보우’를 검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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