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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안현수 금메달, 쿨하게 축하한다

중앙일보 2014.02.17 00:01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철호
수석논설위원
러시아 선수가 된 빅토르 안, 안현수(29)가 쇼트트랙 1000m에서 금메달을 딴 뒤 인터뷰를 이렇게 맺었다. “선수들이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이런 말도 했다. “계속 뛰고 싶었고, 부상으로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안현수는 2003년부터 쇼트트랙을 지배해 온 강자다. 순간적인 폭발력과 섬세하면서도 격렬한 코너링이 일품이다. 그제 소치 얼음판에 선보인 그의 실력은 전성기에 못 미친 게 사실이다. “빙상연맹이 한물갔다고 깎아내렸다”(부친의 증언)거나 “안현수? 잘 타는 외국선수일 뿐”(한국 쇼트트랙 코치)이란 평가가 틀린 게 아니다. 그럼에도 한물간 결과가 금메달이란 사실이 뼈아프다. 빅토르 안의 완벽한 승리다.



 안현수의 후폭풍은 광풍으로 변하고 있다. “빙상연맹은 목메달감”이란 댓글과 짬짜미·파벌·왕따 같은 비난이 난무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안 선수의 귀화가 체육계의 구조적 부조리와 난맥상 때문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빙상연맹은 공공의 적이 됐다. 자정기능이 마비됐다면 당연히 비정상의 정상화가 필요하다. 문화체육관광부 조사-감사원 감사-검찰 수사는 시간 문제로 보인다.



 하지만 과도한 반응은 금물이다. 인터넷에선 “슬픈 우리 역사는 될 성싶은 싹은 죄다 역모로 몰아 죽였기 때문”이라는 자학이 판친다. ‘안현수=선, 빙상연맹=악’의 이분법이 선명하다. 물론 뛰고 싶어도 뛸 수 없었던 안현수의 현실은 짠하다. 올림픽 메달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올림픽 선수들은 “참가하는 의의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메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 이해한다”고 입을 모은다.



 우리는 겉으로는 올림픽의 상업주의와 국가주의를 경멸하는 척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효자 종목’ ‘메달 텃밭’이란 표현이 거침없이 나온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면서 우리는 곧잘 2등을 잊어버린다. 은메달에 머무른 선수가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도 우리뿐이다.



 이제 분노를 삭이고 눈을 돌려보자. 국민체육진흥공단 블로그에는 영국 웰링턴 장군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폴레옹을 꺾은 워털루의 승리는 이튼학교의 운동장에서 시작됐다.” 단체 스포츠를 통해 배운 리더십이 승리의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다. 그런 영국도 기나긴 올림픽 암흑기를 견뎠다. 1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1~5위의 스포츠 강국이었지만, 그 후 80년간 한 번도 세계 5위 안에 든 적이 없다. 베이징·런던 올림픽에서 잠깐 다시 반짝했을 뿐이다.



 미국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금메달이 아니라 전체 메달 수로 순위를 집계한다. 안현수가 러시아에 앞서 미국 귀화를 타진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은 국적 획득이 까다로운 데다 안 선수가 요청한 재정지원을 거부해 무산됐다. 무리를 하면서까지 세계 1위나 메달 색깔에 집착하지 않는 게 미국이다.



 금메달과 거리가 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핸드볼)이나 ‘국가대표’(스키점프) 같은 영화들이 한국 사회에 나온 것은 긍정적인 조짐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국민의 35.9%만이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며, 절반 이상이 일주일에 단 한 번도 운동을 하지 않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1988년 이후 여름·겨울올림픽에서 4~14위로, 대부분 일본을 압도했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다음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시드니 올림픽 현장을 묘사한 『승리보다 소중한 것』의 한 대목이다. “승리를 사랑한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기분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때로는 승리하고 때로는 패배한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빅토르 안을 ‘매국노’라 손가락질하거나, 우리 사회의 ‘손보기’가 무차별 마녀사냥으로 변질될까 겁난다. 우리도 그의 성공 스토리를 쿨하게 축하하는 선에서 그쳤으면 한다.



이철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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