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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사계절 겪는 스타의 뒷모습 그 뮤지컬 짠하네

중앙선데이 2014.02.15 21:02 362호 24면 지면보기
‘브로드웨이 뮤지컬 오리지널 내한공연’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익숙한 명곡을 원어로 부르는 뛰어난 가창력이 감탄스럽긴 해도 알 만한 스타도 아니고 누가 누군지 헷갈리기까지 하는 노란 머리 배우들에게 감정이입이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식 가벼운 풍자와 유머, 저들이 열광하는 동화적인 판타지도 우리네 정서에 썩 와닿지는 않는다.

뮤지컬 ‘저지보이스’ 1월 17일~3월 23일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

주크박스 뮤지컬 ‘저지보이스’ 내한 소식에도 그러려니 했다. 2005년 초연 이래 8년 동안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 흥행순위 톱3를 지키고 있고, 2006 토니어워즈 최고의 뮤지컬상을 비롯해 4개 부문을 수상했다는 화려한 수사도 공허하게 들렸다. 1960년대를 풍미한 미국 원조 아이돌의 다큐멘터리적 내용이라니, 적당히 로맨스를 가미한 그렇고 그런 해피엔딩 성공스토리겠지. 결정적으로 주크박스 뮤지컬의 존재 이유인 ‘추억 공유’가 가능한 노래들이 아니지 않은가. ‘비틀스’나 ‘롤링스톤스’도 아닌 ‘포시즌스’의 50년 전 히트곡에 우리가 얼마나 공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주크박스의 추억’이란 게 꼭 특정 가수의 특정 노래를 들어야 환기되는 게 아니며, 꼭 그 시절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있어야 향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을 웅변하는 것이 ‘저지보이스’ 무대였다.
1막만 해도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그룹명을 따 이들의 일대기를 4계절에 비유한 무대 중 네 친구가 만나고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과정이 ‘봄’ ‘여름’에 담겼다. 숨가쁘게 빠른 전개와 요즘 노래에서 듣기 힘든 감미로운 멜로디의 곡들이 뮤지컬에 제격이구나 싶은 정도였다.

2막에 들어서자 극의 무게가 달라졌다. 멤버 간 갈등과 팀의 해체, 각자의 성공과 불행이 교차하는 가운데 인생에 대한 통찰과 삶과 죽음의 관조까지 어우러진 ‘가을’과 ‘겨울’이 주는 묵직한 여운에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지금껏 ‘뮤지컬은 판타지’라고 굳게 믿고 있었건만, 뜻밖의 감동을 낳은 건 스타의 환상을 박살내는 리얼리티 퍼레이드였다. 때론 현실이 소설보다 더 극적이라고 했던가. 누구나 지나는 인생의 사계절을 똑같이 겪어내는 스타의 뒷모습이 짠했다. 거기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로맨스도, 짜릿한 성공시대도 없었다. 그저 오다가다 만난 네 남자가 적당히 간을 보다 뭉치고, 우여곡절 끝에 스타대열에 올랐으나 누구는 사생활을 통제하지 못해 추락하고, 누구는 살아남아 불멸의 히트곡까지 내지만 그의 인생도 결코 순탄치 못했다는 이야기엔 조금의 미화도 과장도 없었다.

어느 한 명의 시점이 아닌 네 멤버 모두에게 발언 기회를 주었기에 얻어진 리얼리티였다. 봄·여름·가을·겨울, 각 계절의 상징적 의미에 딱 맞는 멤버가 각 장의 내레이션을 담당하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객관적 시선에서 자신들의 굴곡진 과거를 바라보게 했다. 결코 완벽한 영웅도, 절대적인 루저도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듯.

관극 내내 ‘서태지와 아이들 버전을 만든다면 대박일 것’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긴 했지만, ‘포시즌스’의 인지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이 무대와 객석이 공명하는 데 아무 상관없었다. ‘Sherry’와 ‘Can’t take my eyes off you’ 외에 콕 집어 아는 노래도 없었지만 모든 곡이 대중적인 멜로디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노래들이라 금세 그리운 정서를 자아냈다. 반짝이 재킷을 맞춰 입고 깜찍한 안무를 곁들인 네 남자의 흥겨운 쇼는 국경을 넘고 타임 라인을 건너 영화에서나 보던 60년대 미국의 클럽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향수를 부르는 건 노래만이 아니었다. 친구끼리 악수 한 번으로 맺은 계약을 끝까지 지키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빚을 오랜 세월에 걸쳐 대신 갚아주는 미담은 그때 그 시절이기에 가능했던 낭만이었다. 간간이 등장하는 팝아트 작가 로이 리히텐슈타인을 연상시키는 카툰 영상 역시 60년대 미국을 추억하고 있었다.

지난해 한 연출가는 주크박스 뮤지컬을 만들며 “히트곡의 추억에 기대지 않고 스토리로 승부하겠다”고 호언했었다. 결과적으로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왜 그 노래들이 그 작품에 흘러야 하는지를 관객에게 소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애초에 수십 년의 세월을 넘나들지 않는 스토리를 가진 주크박스 뮤지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추억’이란 주크박스 뮤지컬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생뚱맞은 스토리에 분위기를 맞춘다며 불후의 명곡에 안타깝게 생채기를 내 후벼낸 불편한 감정보다 가수의 진솔한 일대기 속에 생생히 살아난 원곡의 정서야말로 추억을 먹고 사는 주크박스 뮤지컬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감동 아닐지. 가보지도 못한 몇 세대 전의 미국을 추억하게 만든 ‘저지보이스’가 주크박스 뮤지컬의 ‘갑’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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