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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들타운·공구박물관·소극장 … 예술특구로 다시 날다

중앙일보 2014.02.15 00:15 종합 17면 지면보기
오래된 건물과 빈 상가. 그리고 낡아 보이는 도로. 국내 대도시에는 어디든 이런 구도심(舊都心)이 있다. ‘대한민국 중구(中區)’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한때 ‘신식(新式)’의 상징이었으나 도시가 팽창하면서 옛 영광을 잃어갔다. 성장과 개발을 앞세운 현대화 물결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대한민국 중구의 재발견

그랬던 중구들의 변신이 요즘 눈에 띈다. 문화·예술·관광이라는 날개를 달고서다. 서울뿐만 아니다. 부산·인천·울산 등 대도시들의 공통적 현상이다. ‘낡음’이 아닌 ‘재생’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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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의 공존=부실 논란이 거셌지만 지난해 숭례문 복원에는 주목할 대목이 있다. 일제가 없앤 성곽 일부가 되살아났다. 동쪽의 성곽 53m, 서쪽 성곽 16m가 복구됐다. 1392년 조선 창건 이래 한양의 얼굴, 이후 서울의 상징이었던 숭례문의 원형이 일부나마 제 모습을 갖춘 것이다. 17일에는 서울성곽 4소문 중 하나인 광희문이 39년 만에 개방된다. 600년 고도(古都) 서울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현재 서울 중구의 면적은 10㎢ 정도. 서울시 전체 면적의 1.6%에 불과하다. 상주인구도 14만 명 수준으로 25개 자치구 중 가장 적다. 하지만 1일 유동인구는 80만 명에 이른다. 강남구(110만 명)에 이어 둘째다. 아직 도심의 활력이 살아있다는 얘기다.



 특히 서울을 찾는 관광객 85% 이상이 중구를 거쳐간다. 2000년대 들어 한류 바람을 타고 찾아오는 일본·중국 관광객 덕분이다. 서울 명동 상권에 생기가 돌았고, 남대문시장은 ‘필수코스’로 자리를 잡았다. 서울시와 중구, 정부는 남대문·동대문·명동·북창동·무교동 일대를 관광특구로 지정했다. 외국 관광객을 수용할 호텔 신축공사도 활발하다. 2017년 완공 예정인 서소문 역사공원도 주목된다. 서소문공원과 명동성당, 나아가 새남터 성지를 이을 계획이다. 남대문시장도 연결된다. 서울을 대표하는 관광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인천 중구의 역사성도 각별하다. 서울처럼 도시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육지 서쪽 끝 인천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19세기 말에 개항 이후 온갖 신문물의 들머리였다. 국내 첫 축구경기(영국 수병·1882년)가 열렸고, 국내 최초의 호텔(대불호텔·1888년)도 들어섰다. 최초의 사이다 공장(인천탄산·1905년) 또한 중구 신흥동에 세워졌다. 짜장면 원조식당인 ‘공화춘’도 이곳에 터를 잡았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인천시청과 경찰청이 잇따라 남동구로 자리를 옮기고, 송도 국제신도시 같은 곳이 개발되면서 중구는 빛을 잃었다. 인천 중구는 부활의 키워드를 먹거리, 그중에서도 ‘면(麵)’에서 찾았다. 짜장면·쫄면과 세숫대야 냉면의 원조가 인천 중구이고, 한때 칼국수 골목까지 있었다는 점에 착안해 2018년까지 ‘누들(noodle) 타운’을 만들기로 했다. 면류를 파는 음식점만 늘리는 게 아니라 면 요리 전문학교(아시아 누들 스쿨)와 박물관까지 짓는다는 구상이다. ‘누들 박물관’ 건립 계획은 한때 ‘누드 박물관’ 계획으로 와전돼 인천시가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예술과 문화의 힘=대구 중구도 ‘옛것’에서 새 길을 찾아냈다. 1950년대 형성된 북성로 공구골목에는 300여 가게가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수물자 등을 주로 팔다가 제3산업공단·이현공단 등 산업단지가 들어오면서 호황을 맞았다. 그러다 1997년, 2008년 잇따른 국제금융위기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대구 중구는 이 골목에 산업문화를 입혔다. 지난해 6월 국내 첫 공구박물관을 건립했다. 1930년 일제강점기 때 식량창고로 쓰였던 2층 건물을 활용했다. 공구 기술자들의 작업공간을 재현했다. 방문객들이 직접 소품도 만들어 보도록 했다. 인근 근대식 건물의 원형을 살려 문화자산으로 활용하는 사업도 2011년부터 진행 중이다.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역사 인프라를 구축한 것이다.



 광주의 구도심은 동구다. 이곳 역시 도시재생 아이템으로 예술을 선택했다. 광주 동구는 2005년 전남도청이 전남 무안으로 떠나면서 침체가 시작됐다. 30만 명이던 인구는 10만 명으로 줄어들자 쇠락하던 도심을 ‘예술로 채우자’는 의견이 나왔다. 2011년부터 광주비엔날레재단이 진행 중인 ‘폴리(Folly) 프로젝트’다. 폴리란 작은 탑 같은 도시 장식용 건물을 뜻하는 옛 단어. 오래된 골목길 같은 곳에 예술작품을 설치하자 외지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인천 중구 송월동도 아기자기한 옛 골목길을 벽화로 가득 채웠다. 왕자와 공주 등 동심을 자극하는 소재들이 주택단지 일대에 가득하다. ‘동화마을’이라는 별칭이 생기기도 했다.



◆지자체와 기업의 후원=울산 중구도 문화에 방점을 찍었다. 예부터 울산의 중심지였던 이곳 성남동엔 현재 20년이 넘은 2~4층 건물이 가득하다. 한 3층 건물 계단을 올라가자 연극 포스터가 뒤덮인 벽이 나온다. 극단 천씨네 대표 천영진(43)씨가 지난해 11월 만든 소극장이다. 그는 “중구청이 임대료를 내줘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울산 중구청은 이곳에 입주하는 예술인들에게 한 달 최대 30만원까지 월세를 지원한다. 처음 입주할 때 내부 공사비 명목으로 800만원도 준다. 2008년 ‘구도심 살리기’를 펼치면서 도입한 정책이다. 성남동 일대를 ‘문화의 거리’로 지정하고, 예술인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덕분에 빈 가게가 즐비했던 거리에 갤러리와 소극장이 잇따라 들어섰다. 샌드갤러리 김상식(44) 관장은 “성남동을 찾는 사람들이 2~3년 전보다 몰라보게 늘었다”고 전했다. 방문객이 늘면서 카페도 최근 2년 새 15곳이 새로 생겼다.



 부산 중구는 상권이 번성한 곳이었다. 서울 명동에 비유되는 남포동·광복동이 있었고, 자갈치시장이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98년 부산시청이 연제구로 빠져나가며 큰 타격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해운대가 신도심으로 피어났다.



 그랬던 부산 중구를 일으키고 있는 건 기업이다. 2009년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들어서며 활기를 되찾았다. 크루즈선을 타고 들어오는 외국인 관광객 또한 늘었다. 남포동 부평시장은 요즘 ‘야시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또 하나의 ‘원군’도 생겼다. 지난해 말 중구와 영도구를 잇는 영도대교가 다리를 들어올리는 ‘도개(跳開)’를 47년 만에 재개했다. 하루 한 차례 정오에 10분간 다리를 75도 각도까지 들어올리는 장면을 보러 주말이면 하루 2만여 명이 몰릴 정도다.



 대도시 중구들의 손잡기도 시사적이다. 96년 6월 서울·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울산 중구청장이 모인 게 시초였다. 구도심의 위기에 대한 공감대를 쌓아갔다. 서로 아이디어를 나누고, 공동의 이름으로 정부 지원도 요청했다. 지금까지 모두 24차례의 회의가 열렸다.



◆사람들의 온기가 넘치는 곳으로=도심 재생 프로젝트는 세계 대도시들의 공통된 과제다. 도시의 어제를 기억하는 동시에 새로운 내일을 열어가자는 뜻에서다. 보존과 개발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시도는 외국에서 보다 일찍부터 진행됐다. 도시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1993년 프랑스 파리 12구에 등장한 프롬나트 플랑테’(나무로 조성된 산책로)가 대표적이다. 오랫동안 방치됐던 폐선 철로를 4.5㎞ 길이의 산책로와 문화공간으로 바꾸었다. 10여m 높이에 설치된 철길과 이를 지탱하던 거대한 아치형 하부구조에 예술 관련 상점과 아틀리에가 들어서면서 당시 사회적 문제이던 고가 철로 밑의 슬럼화 문제를 해결했다.



 독일 함부르크 하펜시티는 신구의 조화를 이룬 혁신적 항구도시로 꼽힌다. 수자원을 적극 활용한 미래형 주거단지를 조성하고, 옛 항구의 창고를 문화시설로 변모시켰다. 쇠퇴일로에 놓였던 영국 철강도시 셰필드도 80년대부터 지역문화정책을 꾸준히 실시해 산업도시 이미지에서 벗어났다.



 도시재생의 핵심은 사람이다. 한양대 구자훈(55·도시대학원) 교수는 “새 볼거리에 대한 흥미가 식은 뒤에 어떻게 할 것인지를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 결국 주민 삶의 질이 높아져야 하는데 아직 그 단계까지 온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유럽 도시 문제에 천착해온 김정후 박사(영국 런던대 UCL 지리학과)도 “생색내기 공공디자인, 관광을 앞세운 환경개선 등은 무늬만 도시재생일 뿐이다. 겉만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라 시민들이 행복하고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차상은·강기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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