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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예 기자의 '위기의 가족'] 우리집 세입자

온라인 중앙일보 2014.02.11 00:01
“당신, 살림에도 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



부엌에서 시간을 보내던 남편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뿔싸. 그러고 보니, 감기 걸린 아이를 위해 끓여뒀던 닭곰탕을 일주일이 다되도록 안 치웠단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남편이 발견한 냄비엔 온갖 곰팡이들이 피어 고약한 냄새를 피우고 있었겠지요. 맞벌이 하는 아내를 위해, 팔을 걷어붙였던 남편이 한마디를 합니다.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잠시. 이내 속으로 ‘좀 이해해주면 안되나’란 서운함이 울컥 일기 시작합니다. 결국 남편과 저는 한동안 ‘살림의 의무’를 놓고 아옹다옹 설전을 했었더랍니다.



우리 법에 나오는 부부의 의무는 어떤 것일까요. 법전을 보실 일들이 거의 없으실 테니,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제826조 [부부간의 의무] ①부부는 동거하며 서로 부양하고 협조하여야 한다. 그러나 정당한 이유로 일시적으로 동거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서로 인용하여야 한다.②부부의 동거장소는 부부협의에 따라 정한다. 그러나 협의가 이뤄지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당사자 청구에 의하여 가정법원이 이를 정한다.



이번 회에는 7년을 한집에서 같이 살았지만 ‘부부사이’인지 여부를 놓고 법정 다툼을 벌였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실어보겠습니다. 내용은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각색합니다.



#아내의 이야기

“7년을 같이 살았는데, 나더러 세입자라고?”




듣기만 해도 악이 치받는다. 같이 자고 먹고 지내온 시간이 얼만데, 이제 와서 나더러 “세입자”란 소리를 하는 건지. 이게 나이 오십줄에 들어야 할 소리인가.



그를 만난 건 고모 때문이었다. 전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사는 나를 측은하게 생각했던 고모는 “비슷한 처지의 남자가 있다. 괜찮으니 한 번 만나보라”며 자리를 마련했다. 전남편과 헤어지고 2년 만의 일이었다. 남자라면 지긋지긋했지만, 사실 ‘남자’라는 울타리 없이 나이 든 여자가 세상을 혼자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일이라도 할라치면 ‘혼자 사는 여자’라고 여기는 일들이 허다했다. 전 남편도 정착해서 사는데, ‘나라고 왜 안 될 성 싶으냐’란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만난 남자는, 말이 잘 통했다. 남자 역시 이혼의 상처를 한 번 겪었던 터라 처지가 비슷한 점도 있었다.



만남이 깊어지면서 우리는 합치기로 했다. 남자가 “내 이름으로 된 건물이 있으니, 들어와 살면 어떠냐”고 했고, 나 역시 흔쾌히 응했다. 남자의 집엔 어머니가 함께 살았다. 합가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시면서, 우리는 신혼부부처럼 지냈다.



같이 산 지 3년째 되던 해였을까. 제대로 전입신고를 해야겠단 생각에 동사무소를 찾았다. 남자를 세대주로, 나를 ‘처’로 표기해 신고를 했다. 그로부터 두달 뒤, 부부관계로 신고가 됐단 사실을 알게 된 남자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혼인신고도 안 했는데,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남자의 항의로 동장은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처’에서 ‘동거인’으로 바꿔 기록했다.



이 일을 계기로 우리는 급격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세입자일 뿐, 아내가 아니다”라며 계약서 쓰기를 요구했다. 겨우 방 한 칸을 쓰고 있을 뿐인데, 남자는 완강했다.



너무 억울했다. 세입자가 집주인과 잠을 같이 잘 수가 있나. 우리 둘의 사이가 그저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였다면, 그동안 타온 내 명의로 된 차는 또 뭐란 말인가. 몇 년 전 남자는 “차가 필요하다”며 “대신 네 이름으로 사자”고 했다. 남자가 과속해 물게 된 과태료며 세금도 내가 냈고, 남자를 피보험자로 해서 보험까지 들고 돈을 오랫동안 내기도 했는데, 이제 와서 부부가 아니란 건 정말 피가 솟구치는 일이다.



#남자의 이야기

“방 빌려줬더니 아내 자리 넘봐?”




여자를 만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결혼할 생각을 하고 만난 건 아니었다. 이혼해서 오갈 데 없는 여자를 ‘빈 방이 있으니 들어와 살라’고 한 것뿐이었다. 시간이 오래되면서 여자는 많은 걸 바라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땐, 며느리 노릇을 하려 했고, 돌아가신 뒤엔 동네 사람들에게 우리를 ‘부부 사이’라고 소개하고 다녔다.



우연히 동장을 길에서 만났는데, “재혼한 거냐”란 소리를 들었을 땐 어이가 없었다. 아내 노릇까지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 동사무소에 자신을 ‘처’로 기입했다니. 그날로 여자를 만나 다짐을 받았지만, 여자는 포기하지 않는 듯했다.



여자의 집착이 심해지면서 안 되겠단 생각에 월세 영수증을 받아놓기도 했다.



“계약금 400만원, 이 돈을 월세금 명목으로 계약한다. 월세금 장소는 방 한 칸과 일반시설, 부엌 사용으로 계산한다.”



그리고 얼마 뒤, 참다못한 나는 집을 팔기로 했다. 매매계약을 맺고 두 달, 나는 혼자 이사를 나왔다.



#법원의 판단은

“남자에게 부부로서 공동 생활할 의사 없어, 부부 관계 인정 안돼.”




남자가 이사를 나가고 난 뒤, 여자는 소송을 냈다. “사실혼 관계였는데도 불구하고 집을 마음대로 팔고, 다른 여자와 살고 있다”면서 남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그러자 남자는 “세입자였을 뿐이었다”며 반박했다. 여자 측이 3~4년간 남자 명의 통장으로 보낸 10만원, 20여만원의 입금내역을 증거로 들었다.



부산가정법원은 “사실혼이란 당사자 간에 혼인 의사가 있고, 사회적으로 정당시되는 실질적인 혼인생활을 하면서, 형식적 요건인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을 때를 말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관점에서 두 사람은 “단순한 임대인과 임차인의 관계는 아니었지만 사회적으로 부부 공동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봤다. 예컨대 수입과 지출을 공유하거나, 서로의 가족들끼리의 행사에 참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부 사이’라고 소개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여자가 작성해준 월세영수증 등은 부부사이에서 작성할 만한 문건이 아닌 점 등을 보면 남자에게 부부로서 생활할 의사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두 사람이 부부 공동생활을 인정할 만한 혼인생활의 실체가 있었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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