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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느꼈다, 호흡·몸짓에 스민 우리 정서

중앙선데이 2014.02.08 16:22 361호 8면 지면보기
1 김지욱 안무 ‘Mist’. 자아를 찾는 과정을 영상을 배경으로 담았다.
초콜릿과 와플, 맥주의 나라로 유명한 벨기에는 최근 몇 년 사이 현대무용의 새로운 중심 국가로도 급부상 중이다. 2006년 리에주에서 시작된 무용 비엔날레 ‘춤의 나라들(Pays de danses·1월 24일~2월 14일)’이 올해로 5회라는 그리 길지 않은 역사에도 유럽 전역으로부터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이유다.

벨기에 무용 비엔날레 ‘춤의 나라들’ 달군 한국 컨템퍼러리 댄스

리에주는 3개 국어를 쓰는 벨기에에서 프랑스어권 중 가장 큰 도시로 무용 강국 프랑스와 교류가 특히 활발하다. 인구는 20만이 채 안 되지만 근교 도시까지 합치면 60만이 넘어 적지 않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다. 올해의 축제는 지난해 10월 새롭게 둥지를 튼 리에주 극장(사진)을 거점으로 베르비에, 앙기스 등 8개 근교 도시에서 3주 동안 펼쳐진다.

특히 올해는 한국 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권영빈)와 함께 특집 행사로 ‘코리아 포커스(Korea Focus)’를 기획했다. 5편의 무용 작품과 전시, 워크숍, 콘퍼런스도 함께 해 한국의 컨템퍼러리 예술을 파노라마로 펼쳤다. 과거에도 한국의 무용을 특집으로 다룬 축제는 종종 있었지만, 한국의 컨템퍼러리 댄스를 축제의 테마로 소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2, 3, 8 이재영 안무 ‘휴식’. 휴식의 간절함과 공허함을 농구라는 모티브로 풀었다. 4, 5 임진호 안무 ‘I go’. 이수진의 춤은 가벼우면서도 유연했다. 임진호·지경민과 트리오가 되어 죽음 앞의 인간 모습을 그려냈다. 6, 7 임지애 안무 ‘생소한 몸’. 간간이 몸속에서 녹아나오는 한국춤은 임지애만의 특유한 언어였다.
축제의 첫 장 연 한국팀 … 민첩함과 기교에 찬사
축제의 첫 장은 한국팀들이 열었다. 김지욱의 ‘MIST’와 고블린 파티의 ‘I go’(1월 24~25일 리에주 소극장)에 이어 이재영의 ‘휴식’과 임지애의 ‘생소한 몸’(1월 26일 엥기스 문화센터, 1월 28일 브뤼셀 상고르 극장)이 뒤를 이었다.

이미 국내에서도 호평을 받은 바 있는 4편의 젊은 안무가 작품에 대한 현지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르 수와르(Le Soir), 라 리브르 벨지크(La Libre Belgique) 등 벨기에 주요 언론에서 한국 작품을 소개한 터라 많은 관객이 몰렸다. 결과는 무엇보다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무척 민첩하고, 기술이 뛰어나다는 평이 압도적이었다. 한국 춤에 뿌리를 둔 임지애의 이국적인 몸짓뿐 아니라 김지욱·임진호·지경민·이재영·정재우 등 남성 무용수의 파워풀하고 긴장감 넘치는 춤을 본 관객들은 “서양 무용수들과는 또 다른 다이내믹한 젊은 힘이 넘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중국이나 일본 무용수에게는 없는 섬세함과 강한 에너지를 동시에 발산하는 교차성을 높이 샀다. 한국 컨템퍼러리 댄스를 평가하는 데 춤 기량이 가장 우선적으로 거론될 정도로 “춤을 정말 잘 춘다”는 상찬이 줄을 이었다.

작품에 대한 평도 좋았다. 프랑스어권 연극이 텍스트에 중점을 두는 것이 식상해 색다른 컨셉트를 가진 무용축제를 개최했고, 무용 중에서도 움직임 위주의 작품을 선호한다는 리에주 극장장 세르주 랑고니(Serge Rangoni)는 한국 작품을 이렇게 평가했다.

“아시아권에서는 처음으로 특집 행사를 진행하며 한국을 선택했다. 한국의 컨템퍼러리 댄스는 매우 앞서 있기 때문이다. 무용수들의 기량은 세계 ‘톱’이고, 특히 작품 안에 녹아 있는 유머는 독특하다. 아마도 벨기에처럼 여러 인접한 나라의 정서를 혼합한 데서 오는 장점인 것 같다. 개념적이고, 설명적인 유럽의 춤과 비교하면 단순한 주제를 풀어가는 몸짓이 예사롭지 않다. 몸짓 하나로 승부를 거는 게 장점이다.”

이재영의 ‘휴식’은 안무 면에서 가장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농구공 대신 머리로 드리블을 하는 발상부터 신선했고, 움직임 곳곳에 숨어있는 재치가 관객을 사로잡았다. 세계인 누구나 대번에 알 수 있는 농구를 모티브로 한국의 ‘해학’을 설명하고 있어 앞으로 세계 각국에서 많은 러브콜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사실 세계 무대를 겨냥한 한국 현대무용 작품 중 대다수가 서양인에게는 없는 우리의 정서와 우리의 철학, 문화를 소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나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표현방법 또한 때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작 외국인들이 무용 예술을 통해 찾고 있는 우리의 ‘미(美)’는 움직임 자체에 있음을 이번 축제를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전통춤을 추지 않아도 한국인만의 호흡, 발걸음, 태도 등에서 한국 정서를 그들은 발견해 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주제와 설정을 통한 전개보다는 움직임을 통한 표현을 가장 높게 평가했다. 독일의 표현주의나 프랑스의 누벨 당스 등 서양의 개념으로 포장된 정체불명의 개념보다는 안무가 개인의 성격, 개인의 취향을 그대로 몸으로 표현했을 때 그야말로 ‘통하였다’. 전통을 표현하려 하기보다는 전통을 몸에 담은 ‘나의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라는 교훈이다.

9 살바 상키스 안무 ‘더 오르간 프로젝트’. 파이프 오르간과 어우러진 춤의 미니멀리즘. 10 비르질리오 시에니 안무 ‘피노키오, 약간 다른’. 맹인 무용수 귀세프 코무니엘로 출연으로 화제가 됐다. 11 미셀 누아레 안무 ‘영상과 맞추지 않는’. 12 호세 몽탈보 안무 ‘트로카데로의 돈키호테’. 13 비르질리오 시에니 안무 ‘봄의 운동’. 14 비르질리오 시에니 안무 ‘드 아니마’.
15 펠리시트 샤즈랑 안무 ‘오 필 드 수와 Au fil de soi(e)’.
전통과 현대의 푸짐한 잔칫상 … 브뤼셀선 한국 현대무용 심포지엄
한국 춤 외에도 축제는 화려했다. 에미오 그레코, 호세 몽탈보, 안 테레사 드 키에르스메케르 등 세계적인 유명 안무가들이 이름을 드러냈다. 또 포르투갈의 빅토르 위고 폰테스, 프랑스의 클로드 바르두이 등 떠오르는 스타를 비롯해 미셀 누아레, 클레망 티리옹, 마리아 클라라 빌라 로보스 등이 벨기에를 대표해 참가했다.

특히 이탈리아 현대무용을 이끌어 왔으며 현재 베니스 비엔날레 무용분야 감독으로 있는 비르질리오 시에니(Virgilio Sieni)는 개막작을 비롯해 신작 4편을 연달아 소개해 한국 컨템퍼러리 댄스와 함께 푸짐한 잔칫상을 차렸다. 개막작 ‘드 아니마’(1월 24~25일 리에주 대극장)는 아를르캥(익살 광대)을 모티브로 ‘코메디아 델라르테’(16세기 베니스에서 시작된 이탈리아 연극의 한 형태)를 감각적 색채와 무용수의 현란한 움직임으로 풀어냈다. 무대 뒤에 설치된 여러 갈래의 커튼을 경계로 삶과 죽음을 이야기했다. 나체로 의자에 앉은 여인과 동일한 포즈의 또 다른 여인이 만든 이미지는 한 폭의 그림처럼 강한 인상을 남겼다.

시각예술과 건축을 함께 전공한 시에니의 놀라운 감각은 최신작 ‘봄의 운동’(1월 27일 스렝 문화센터)에서 가장 돋보였다. 6명이 65분간 잠시도 쉬지 않고 숨 가쁘게 펼친 움직임의 나열은 육체로 만든 움직이는 건축물이었다. 맹인 무용수가 출연하는 ‘피노키오, 약간 다른’(1월 30~31일 엥시 극장) 역시 화제를 모았다.

2011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를 통해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시에니는 본인의 바쁜 일정을 뒤로하고 한국 공연을 모두 감상하는 등 한국 춤에 열의를 보였다. 예술감독으로서 이탈리아에서 리에주, 그리고 한국으로 이어진 현대춤의 동향을 베니스 축제에도 고스란히 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컨템퍼러리 댄스들이 펼쳐지는 가운데 파스토라 갈방의 플라멩코는 많은 관심을 끌었다(1월 25일 위이 문화센터). 오빠 이스라엘 갈방과 함께 스페인을 대표하는 플라멩코 스타 파스토라는 30대 초반의 나이에도 농후하고 관록이 넘치는 춤을 선보여 “스페인 춤의 아방가르드를 구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음악과 노래와 춤이 함께하는 플라멩코는 전통춤이 컨템퍼러리 댄스로서 어떻게 진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좋은 사례였다.

리에주 왕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극장에 무용 공연으로는 처음으로 오른 ‘더 오르간 프로젝트’(1월 26일) 또한 인상적이었다. 작곡가로, 모네 극장장을 역임했고 현재 엑상프로방스 음악축제 감독으로 있는 베르나르 포크룰이 오르간 연주를 맡고, 벨기에 출신 살바 상키스가 안무를 맡은 이 작품은 전통과 현대의 조화가 훌륭했다. 19세기 극장, 정면에 가장 크게 자리 잡은 파이프 오르간, 춤을 추기에는 비좁은 무대라는 어려움을 딛고 물같이 연속적으로 흐르는 움직임은 음악과 하나의 몸처럼 훌륭한 앙상블을 이뤘다.

한편 지난해 10월 새롭게 문을 연 브뤼셀 한국문화원에서는 ‘한국 컨템퍼러리 댄스 동향’에 대한 심포지엄이 1월 28일 열렸다. 피에르 클레망 뒤뷔송 전 주한벨기에 대사의 사회로 진행되었는데, 63년 이화여대에 무용과가 생긴 이후의 50년 현대 무용사를 되짚으면서 무용수 양성부터 공연 제작까지 폭넓은 대화가 펼쳐졌다. 결론적으로 벨기에와 한국 간 공동제작에 대한 논의도 거론됐다.

부산 할머니 13명의 댄스로 축제 마지막 장식
이번 축제의 폐막은 안은미 컴퍼니가 장식한다(2월 13~14일 마네주 극장).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돌며 할머니들의 춤을 직접 기록하고 그들의 몸짓을 담은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가 ‘Dancing grandmathers’란 제목으로 오른다. 한 번도 비행기 타고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는 부산 거주 할머니 13명이 무용수로 참여하는 이번 무대는 관객뿐 아니라 축제관계자에게도 매우 의미 깊은 작품이다. 두 차례 한국 방문을 통해 이번 축제를 준비한 해외협력감독 피에르 테이스(Pierre Thys)는 “벨기에 관객이 한국 할머니들을 만난다는 것만으로 한국의 정서를 많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고 한껏 설레 있었다. ‘일반인이 춤을 추고 그 몸짓이 곧 예술이 된다’는 아이디어가 3주간의 긴 여정의 피날레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기대도 덧붙였다.

일요일이면 열리는 리에주 시장에서는 ‘강남스타일’에 맞춰 말춤을 추는 싸이 인형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프랑스어로는 ‘피시(PSY)’라고 불렸다). 한국의 대중문화를 칭하는 ‘한류(Hallyu)’는 이미 고유명사가 됐다. 컨템퍼러리 댄스는 우리에게도 아직까지 그리 친근한 장르가 아니지만, 노래·드라마·영화 등 대중문화를 발판으로 한 유럽의 관심은 이미 이 분야에 대해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춤의 한류’가 조만간 시작될 전조다. 동시대 예술을 통해 우리의 정서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서양의 시선은 지금 이렇게 급속도로 달궈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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