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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만 훔쳐간 와인 문외한 도둑

중앙선데이 2014.02.08 17:13 361호 25면 지면보기
이 세상에 친절한 도둑이 있을까? 하긴 노트북을 훔쳐가며 “당신의 추억까지 가져가진 않겠습니다”라는 메모를 휴대용 USB 와 함께 남겨 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김혁의 와인야담 <8> 도둑과 와인

필자가 와인 여행을 시작한 이후 집에 도둑이 두 번 들었다. 훔쳐갈 것도 별로 없는 원룸 시절에 가장 돈이 되는 것은 카메라였다. 당시엔 필름 카메라를 애용했고 렌즈도 여러 개 있었다. 이들을 모두 한 가방에 넣어 보관했다. 어느 일요일 밤에 집에 돌아와 보니 원룸 바닥에 책들이 널려 있었다. 카메라를 넣어둔 장을 열어보니 역시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필자에게 지금이나 그 당시나 가장 소중한 것은 카메라보다 그것으로 찍은 자료들이다. 슬라이드 필름으로 정리 보관한 사진 자료들은 잃어버리면 그 지역을 다시 여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것을 물질적·시간적으로 환산하면 카메라 가치는 사실 큰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자료들과 더불어 소중한 것이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와인들이다. 병 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가치로 보면 잃어버린 카메라 세트와 비교가 어려운 정도였다. 그러나 도둑은 와인과 자료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아마도 학생전문 털이들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두 번째 도둑은 가치를 좀 아는 친구였다. 넓은 곳으로 이사한 지 채 한 달이 안 된 어느 날 밤, 현관문을 열었더니 난장판이었다. 황급히 없어진 물건들을 챙겨보니 카메라 세트, 출장비, 노트북, 여러 개의 몽블랑 볼펜과 만년필, 그리고 선물로 받은 명품 서류 가방이었다. 추정컨대 명품 가방에 노트북과 나머지들을 모두 넣고 카메라 가방을 메고 유유히 사라진 것 같았다. 카메라는 새로 구입한 디지털 방식이었고 렌즈도 여러 개 있었다. 필자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갖고 갔고 마침 출장 직전이라 현찰 손해도 컸다. 경찰이 왔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이때도 도둑은 카메라로 찍은 자료와 그동안 모아 둔 와인들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60여 병 들어가는 와인 냉장고엔 프랑스 고급 와인과 오래된 빈티지 와인들이 있었고 일반 병의 두 배 사이즈 와인도 여러 병 있었다. 그중 한 병만 가져가도 큰 힘(?)이 되었을 텐데 팔 수 있는 경로가 없었거나 와인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도둑이었다는 생각이다. 천만다행이었다. 아마 프랑스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와인은 씨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많이 잃었으나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와인과 자료는 남아 있었기에 가슴이 쓰렸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두 번의 도둑 사건은 날 변화시켰다. 우선 건물 전체에 보안 장치를 요구했고 개인 보안장치도 하게 됐다. 매달 나가는 보안비는 감수하기로 했다. 또 카메라를 좀 더 좋은 것으로 샀고 덕분에 자료의 질도 높아졌다. 또 찍은 사진들은 여러 곳에 복사해 보관해 두게 되었다.

카메라는 도둑이 전혀 생각지 못할 만한 곳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문제는 와인이었다. 무게도 있고 부피도 있어 숨겨둘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온도와 습도를 어느 정도 맞추어야 한다는 까다로움이 컸다. 가장 좋은 것은 매일 마실 수 있는 가벼운 와인들로 바꿔놓거나 모두 마셔버리는 것이다. 7년 정도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고민 중이다. 모두 마실까? 그럼 누구하고 마실까?

다음 도둑은 필자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제발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다. 와인에 무지한 자이면 더욱 좋겠다. 물론 우리 집에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 진짜 다행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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