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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뜨겁고 차가운…소치 화제의 선수들

중앙일보 2014.02.08 01:30 종합 14면 지면보기
반동성애법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출전하는 호주의 여성 스노보더, 55세 나이에 가파른 눈길을 활강하는 독일계 귀족 출신, 올림픽 출전을 이루기 위해 독일 속옷 회사명으로 이름을 바꾼 통가의 청년….


"푸틴 엉덩이 꼬집어주고 싶다" 레즈비언 스노보더 …
"돈다발 속에 숨고 싶지 않다" 귀족 출신 55세 스키어
통가 루지 선수 "훈련비 대준다면 …"
독일 속옷 회사명으로 이름 바꿔
필리핀 유일한 선수 마르티네스
"쇼핑몰 아이스링크서 꿈 키웠다"

 2014 소치 겨울올림픽이 ‘뜨겁고, 차가운, 여러분의 것(Hot, cool and yours)’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우고 8일(한국시간) 개막했다. 4년마다 열리는 눈과 얼음의 제전에는 3000여 명의 선수가 출전한다. 이들은 저마다 스토리와 사연을 담고 소치 올림픽에 나선다.



‘반동성애법’ 제정한 푸틴에게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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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색깔이 어우러진 무지개 깃발.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 등 성 소수자를 상징하는 깃발이다. 지난해 반동성애법을 제정한 러시아에서는 금지된 깃발이다. 반동성애법은 동성애를 옹호하는 대중 선전을 금지한 법이다.



 러시아는 동성애를 보는 사회 분위기가 서구 국가들과는 크게 다르다.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과 공격도 심한 편이다. 서구 사회에는 반동성애법이 동성애자의 인권과 자유를 위축시키는 탄압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반동성애법에 대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태도는 완강하다. 그는 “법안은 동성애 자체를 금지하는 게 아니다. 동성애를 대중에게 공공연히 선전하는 것과 소아성애에 대한 규제다. 당신들이 뭘 하든 괜찮지만 아이들은 건드리지 말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성애 논란 속에 호주 출신 스노보더 벨르 브로크호프(21)는 가장 주목받는 선수다. 동성애자임을 공개하고 이번 대회에 출전한다. 그는 지난 1월 “대회를 마치고 푸틴의 엉덩이를 꼬집어주고 싶다”고 독설을 퍼부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개막을 앞두고서는 “그 말은 농담이었다. 올림픽이 끝난 후 내 의견을 말할 수는 있지만, 이런 일로 올림픽을 향한 내 꿈을 위기에 몰아넣고 싶지는 않다”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저항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카메라가 내 모습을 잡을 때 손가락 6개를 펼치겠다”고 했다. 올림픽 헌장 6조(국적·인종·지역·종교·정치·성별의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 금지)를 상징하는 행동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차별에 대해 항거하지 않으면서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다양한 저항에 대해 러시아 정부와 IOC(국제올림픽위원회)가 어떻게 대응할지도 관심사다.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은 “의도가 좋더라도, 선수들은 올림픽을 정치적 활동 무대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기자회견 때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은 자유”라고 덧붙였다. 경기장과 기자회견장에서의 행동을 구분한 것이다.



 “난 동성애 스노보더가 아니라 두려움 없는 스노보더로 기억되고 싶다”는 브로크호프는 “내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내 행동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거다. 내 목소리를 내려면, 먼저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한다”며 경기에 대한 각오를 밝혔다. 스노보드 크로스에 출전하는 그가 거둔 역대 최고 성적은 2012년 월드컵 동메달이다.



올림픽 6번째 도전, 사상 둘째 고령자



 40대에 접어들면 스키는 안 타는 게 낫다고 조언하는 정형외과 의사가 많다. 멕시코 대표로 알파인스키에 출전하는 호베르투스 폰 호헨로헤(55)는 이런 잔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그의 이력은 매우 특이하다.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났지만 독일의 작은 왕국 혈통을 물려받은 ‘로열 패밀리’다. 어머니는 피아트 창업자의 조카이며, 아버지는 폴크스바겐의 멕시코 지역 사업을 담당했다.



 그는 멕시코 전통 악단인 마리아치의 악사 복장을 본뜬 독특한 유니폼을 입고 올림픽에 출전한다. 그는 “사람들이 나를 두고 올림픽에 출전해 옷이나 뽐내려는 돈 많은 왕자쯤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돈다발 속에 숨고 싶지 않다. 내 꿈을 이루고 싶다. 내 뿌리는 멕시코”라고 말했다. 그는 스키를 타지 않을 때는 사진작가와 뮤지션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한다. 1981년에는 멕시코에 스키협회를 창설한 괴짜다. 그가 혼자 만든 1인 협회였다.



 이 같은 도전정신 덕분에 그는 겨울올림픽 사상 둘째 고령 출전 선수가 됐다. 역대 최고령 선수는 1924년 프랑스 샤모니 대회 때 컬링에 출전한 스웨덴의 칼 아우구스트 크론눈트(당시 58세)였다. 알파인스키는 컬링과는 비교할 수 없이 격렬한 종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호헨로헤의 도전은 큰 박수를 받을 만하다. 호헨로헤는 84년 사라예보, 88년 캘거리, 92년 알베르빌, 94년 나가노, 2010년 밴쿠버에 이어 소치 올림픽이 6번째 출전이다.



 최고의 선수들이 출전하는 겨울올림픽에서 알파인스키는 상상 이상으로 위험하다. 가파른 경사에 압도돼 출발조차 포기하고 기권하는 선수도 있다. 2010년 밴쿠버 대회 때 호헨로헤는 대회전에서 78위를 차지했다. 100여 명의 출전 선수 가운데 20여 명은 아예 레이스를 포기하거나 실격됐다. 회전에서도 46위를 차지했다. 이 종목에서는 무려 53명이 레이스를 정상적으로 끝내지 못했다. 지난해에는 스키 월드컵에 통산 15번째 출전해 기네스북 등재도 눈앞에 두고 있다.



통가 왕국 사상 첫 출전 선수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의 선전 무대였다. 손기정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기테이 손이라는 이름으로 출전해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손기정은 경기를 마친 후 고국의 지인에게 ‘슬푸다(슬프다)’라는 세 글자를 적어 엽서를 띄웠다.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에도 손기정처럼 태어날 때 불렸던 이름으로 출전하지 않는 선수가 있다. 통가 출신 루지 선수 브루노 바나니(27)다. 손기정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눈물을 머금고 다른 이름을 달고 뛰었지만, 통가의 선수는 상업적 판단에 따라 자발적으로 이름을 바꿨다.



 통가 왕국은 2008년 공개 오디션을 통해 올림픽에 출전할 선수를 물색했다. 겨울스포츠에 푹 빠진 살로테 마필레오 필로레부 투이타(63) 통가 왕국 공주 때문이었다. 평범한 대학생이던 푸아헤아 세마는 루지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정부 지원으로 루지 강국 독일로 건너가 2010년 밴쿠버 대회 출전을 목표로 훈련했지만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름을 브루노 바나니로 바꿨다. 독일에는 똑같은 이름의 속옷 회사가 있다. 기업의 마케팅 활동과 맞물려 개명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건 2012년이었다.



 이름을 바꾼 덕분에 그는 훈련비 등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바흐 IOC 회장은 “스폰서의 이름으로 본명을 바꾸는 건 끔찍한 일이다. 이건 정상적인 마케팅이 아니다”고 펄쩍 뛰었다. 하지만 이를 막을 법적 근거는 없었다.



 바나니 측 관계자는 “이름을 바꾼 게 마케팅을 염두에 둔 건 맞지만 기업과 함께 의논해 결정한 것은 아니다”고 반박하고 있다. 속옷회사 측에서도 “처음에는 이름이 같은 게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의 사연을 알게 됐다. 이름이 같다고 해서 후원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거 아니냐. 그가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통가 왕국의 첫 번째 겨울올림픽 출전 선수다. 바나니는 “꿈이 이뤄졌다. 통가를 대표하는 건 큰 영광이다. 난 스피드를 사랑한다. 모든 것을 잊고 시속 145㎞로 쏘겠다”고 다짐했다.



홍콩·네팔 등 18개국 단 한 명만 파견



 마이클 크리스천 마르티네스(18)는 필리핀의 남자 피겨스케이팅 선수다. 아홉 살이던 2005년 마닐라의 쇼핑몰 아이스링크에서 꿈을 키웠다. 어렸을 때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놀이공원의 아이스링크에서 땀을 흘렸던 김연아와 비슷한 이력이다.



 2010~2011시즌 주니어 그랑프리대회에 데뷔한 그는 2012~2013년 대회에서 처음으로 트리플 악셀에 성공했다. 2012년 시니어 무대로 올라선 그는 루마니아에서 열린 크리스털 스테이크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메이저 대회는 아니지만 필리핀이 피겨스케이팅 국제 대회에서 처음으로 입상한 순간이었다.



 그는 소치 올림픽에 필리핀을 대표해 출전하는 유일한 선수다. 이번 소치 올림픽에는 88개국이 참가한다. 그중 버뮤다·홍콩·네팔·동티모르 등 18개국은 단 한 명의 선수만 파견했다.



 미국인 자선가인 게리 디 실베스트리(47)와 앤젤리카 디 실베스트리(49) 부부는 도미니카공화국에 어린이병원을 설립한 게 올림픽 출전으로 이어졌다. 도미니카공화국의 시민권을 받은 데 이어 도미니카를 대표해 겨울올림픽 첫 출전자가 돼 달라는 제안을 수락했다. 두 부부는 젊은 시절 크로스컨트리 스키에서 엘리트 선수로 뛴 경력을 되살려 출전권을 땄다.



 한국에서는 최흥철(33)·최서우(32)·김현기(31)·강칠구(30·이상 하이원)로 구성된 스키점프 대표팀이 또다시 날아오른다. 이들은 유망주 발굴 프로그램을 통해 초등학교 시절인 1993년 스키점프와 인연을 맺어 20년 넘게 호흡을 맞췄다. 한국 선수단 전체 주장을 맡은 최흥철은 1998년 나가노 대회 이후 5회 연속 겨울올림픽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 스키점프에서는 가사이 노리아키(42)가 7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해 관심을 모은다.



이해준·김효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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