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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흔든 시 한 줄]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중앙일보 2014.02.08 00:29 종합 29면 지면보기
서명숙 이사장이 제주 올레길을 내겠다는 그 결정의 순간에 동백의 ‘절정의 순간’이 힘이 됐다. [최효정 기자]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



동백꽃을 보라



지상의 어떤 꽃도



그의 아름다움 속에다



저토록 분명한 순간의 소멸을



함께 꽃피우지는 않았다



모든 언어를 버리고



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



허공에 한 획을 긋는



단호한 참수



- 문정희(1947~) ‘동백꽃’ 중에서



동백을 마음에 절실하게 품었던 때는 4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다. 2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하다보니 가슴 설레면서 해온 일이지만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피로감이 과중해서 ‘이 한계령을 좀 내려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붉은 동백꽃이 꽃잎을 피워올리듯이 내 전 존재를 기자라는 직업으로 밀고 나갔지만 삶의 무게가 내 등을 떠밀었다. 막상 내려갈 생각을 하니까 너무 막막하고 두렵고 떨렸다. 그럴 때마다 이 시를 보면서 ‘저 단호한 참수’, 언젠가 내가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무에 계속 붙어있으면서 시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절정의 순간에 툭 자신을 떨어뜨리는 그 황홀한 모습이 부러웠다. ‘동백처럼 앞뒤 안 돌아보고 한순간에 떨어지리라.’ 2~3년 이 시를 품고 있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로 떠났다.



 31년 만에 고향 제주로 내려가 올레길을 내면서 동백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전에는 떨어지는 단호함, 가장 화려한 순간에 분명한 소멸을 기하는 동백만 봤는데 그 뒷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홑겹 토종 동백이 무리를 지어 길에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 카펫 같았다. ‘떨어진 뒤의 모습도 이렇게 아름답구나, 꽃무덤으로 누군가에게 꽃길을 열어주는구나’ 싶었다. 낙화 이후에 꽃 비단길을 여는 동백을 보면서 이웃에게 꽃길을 열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리라 마음먹었다. 나의 마지막이 저 동백 같기를 소망한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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