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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시각각] '배임죄' 사용설명서

중앙일보 2014.02.05 00:30 종합 30면 지면보기
권석천
논설위원
여기 형법 제355조 2항이 있다. 배임죄다. 기업 수사의 흙바람이 일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한다. 오늘은 이 법 조항의 기능과 사용법을 익혀보도록 하자.



 1. 기본 사양 : 배임은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거나/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손해를 가한 때’ 처벌하는 것이다. 임무 위배? 대법원 판례는 “당연히 해야 할 것으로 기대되는 행위를 하지 않거나/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 기대되는 행위를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적용 범위가 ‘광대역’이란 뜻이다. 법정형은 일반 배임 징역 5년 이하, 업무상 배임 징역 10년 이하다.



 2. 발전 과정 : 원산지는 독일이다. 일본을 거쳐 1953년 형법 제정 때 수입됐다. 이사 등의 경영 행위에 본격 적용되기 시작한 건 97년 외환위기부터다. 부도 기업에서 경제계 전반으로 확대됐다. “경제위기의 주된 원인이 기업 경영자의 부도덕성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경영자의 경영 실패를 형사상 처벌이 필요한 범죄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게 강동욱 동국대 교수의 분석이다(2012년 논문).



 3. 기본 사용법 : 검찰이 기업 수사를 하다 별다른 혐의가 나오지 않을 때 활용되곤 한다. A(수사) 버튼을 누르면 압수수색과 출국금지, 참고인 소환, 피의자 소환이 차례로 진행된다. B(압수수색) 버튼의 볼륨은 올릴수록 효과적이다. C(기소) 버튼을 누르면 재판 모드로 전환된다. D(불기소) 버튼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수사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최신 기종 사용법 : 과거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정찰제였다. 2009년부터 생산되는 기종엔 E(양형기준) 버튼이 장착돼 있다. 형량 정하는 가이드라인인 양형기준 표에 배임액을 넣으면 반(半)자동으로 처벌 수위가 정해진다. 이를테면 배임액이 300억원 이상이면 기본 형량이 징역 5~8년이다. 형량 결정 과정이 LTE-A급으로 ‘스마트’해진 것이다.



 5. 숨은 기능 : 최신 기종의 숨은 기능은 양형기준을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대법원 판례)가 낡은 것이라는 데 있다. 대법원 판례는 실제 손해는 물론 ‘손해 발생의 위험’까지 배임액에 포함시킨다. 예를 들어 100억원의 담보제공이나 지급보증, 외상거래, 대출을 했을 때 실제 손해가 10억원이라 해도 100억원 전액을 배임으로 본다. 류전철 전남대 교수는 “법원은 배임으로 얻은 이익과 손해를 구체적으로 산정하는 수고를 덜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죄형법정주의의 경계를 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2010년 논문). 한 중견 판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간 대법원 판례가 문제 되지 않았던 이유는 재판부가 피해 상황을 참작해 형량을 낮출 수도 있고,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양형기준이 엄격하게 시행되는 상황에선 지나치게 가혹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6. 사용 후기 : 사용자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오·남용엔 반대하지만 배임죄라도 있어야 오너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냐. 몇몇 재벌의 일탈로 서민들이 고통 받았던 경험을 잊어선 안 된다.”(검사 출신 변호사) “배임죄 앞에선 모든 기업인이 잠재적 피의자란 말까지 나온다. 개인적 이익 추구가 아닌 경영 판단에 대해선 형사처벌의 잣대를 대지 말아야 한다.”(판사 출신 변호사)



 내 의견을 묻는다면 배임죄가 법원과 검찰에 ‘사용하기 편리한 칼’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처벌이 엄해지는 만큼 혐의 판단과 법 적용 기준도 정밀해져야 하는 건 모든 범죄가 마찬가지 아닐까. 개인이든, 기업이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명확하게 가려줘야 법치주의도, 창조 경제도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 배임죄엔 AS가 필요하다.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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