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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낼 수 없는 그를 목놓아 부르다

중앙일보 2014.02.03 00:27 종합 27면 지면보기
등단 25주년을 맞은 중견임에도 나희덕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은 숙련되지 않고 언제나 낯설고 서툴다. 한 행을 쓰고 나면 허공에 덩그러니 놓인 벌레처럼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떠난 자는 떠난 게 아니다. 불현듯 타자의 얼굴로 돌아오고 또 돌아온다. 그들은 떠남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내고, 끝내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된다. 사랑하는 것들은 대체로 부재 중이다. 떼어낸 만큼 온전해지는, 덜어낸 만큼 무거워지는 이상한 저울, 삶. (중략) 이미 돌이킬 수 없거나 사라진 존재를 불러오려는 불가능한 호명, 시.’

일곱 번째 시집 펴낸 나희덕
남동생 잃고 한동안 자폐의 시간
상실·의지의 다툼 끝에 얻은 시어



 시집의 말미에 붙은 시인의 산문에 눈물을 쏟았다. 올해 등단 25주년을 맞는 나희덕(48)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 지성사)은 사랑하지만 떠나보내야 했던 이를 목놓아 부르는 초혼가(招魂歌)다. 죽음이 드리운 슬픔의 그림자와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삶에 대한 의지가 치열하게 다툰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제 마른 가지 끝은/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당신 옷깃만 스쳐도/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나부끼는 황홀 대신/스스로의 棺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어떤 나무의 말’)



 시집을 여는 첫 번째 시는 서늘하게 아프다. ‘마른 풀 위로 난 바퀴 자국/황급히 생을 이탈한 곡선이 화인처럼 찍힌 아침’(‘그날 아침’)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남동생이 시인의 가슴에 박혔다. 동생이 떠난 방을 눈으로 더듬고(‘다시, 다시는’) 더 이상 말을 주고받을 수 없음을 슬퍼하며(‘상처 입은 혀’) 시인은 ‘난파된 배처럼 가라앉는 방’(‘불투명한 유리벽’)에 스스로를 가뒀다.



 “상실은 수동적으로 겪어야 하는 시간이에요. 남동생이 세상을 떠난 뒤 밤과 같은 시간을 보냈죠. 동생의 죽음을 쓰지 않으려 내적으로 저항했어요. 죽음에 대한 모독같이 느껴지고 경험을 소비해버리는 것 같아서 싫었죠. 치부나 고통을 공개적으로 내보이는 것이 수치스럽기도 했구요. 하지만 작가는 상처받은 치유자에요. 자기의 상처를 통해서, 상처를 대면하도록 하는 게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겠죠.”



 삶의 덧없음을 마주하고 좌초했던 시인에게 떠남은 상처를 대면하고 치유하는 계기였다. 사고가 난 이듬해인 2012년, 영국 런던대 교환교수로 머물며 시인은 자폐의 상태에서 벗어나 타자와 세계를 향해 조금씩 나아갔다. 그때 쓴 시가 표제작인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이다.



 ‘말들이 돌아오고 있다/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중략)//지금은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중)



 “어느 날 바닷가에 서 있는데 파도가 마치 말갈기를 휘날리며 밀려오는 듯했어요. 파도가 바다 저편에서 돌아와 내가 살았던 시간과 공간과 만난 것 같았죠. 내가 부친 소포를 받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돌아오고 회귀하고 회복되는 듯했어요.”



 다시 돌아온 삶 앞에서 시인의 발걸음은 한결 자유로워졌다. 그의 등단작 ‘뿌리에게’의 대척점에 놓인 듯한 시 ‘뿌리로부터’는 그런 변화를 보여준다.



 “‘뿌리로부터’는 25년 시작(詩作)의 중간 결산과 같은 시예요. 뿌리를 내리고 안정되려고 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죠. 하지만 가지가 뻗어나가려는 것은 중력에 맞먹는 힘이 필요한 일이고. 덧없는 것에 대한 찬미이기도 하고.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감정의 색깔이 달라졌어요. 좀 자유로워진 듯해요. 나만이 쓸 수 있는 정직한 시를 쓰려고 해요.”



 죽음을 감싸안고 사랑을 안은 채 다시 길을 나서는 시인. 긴 어둠을 거쳐 어둑한 새벽을 지나 밝은 아침을 맞으려 가듯, 그는 이렇게 다짐한다.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마음의 지평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누군가 까마득히 멀어지는 풍경/그 쓸쓸한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나는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 하네’(‘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중)



글=하현옥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나희덕=1966년 충남 논산 출생. 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뿌리에게’가 당선되며 등단.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등. 시론집 『한 접시의 시』,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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