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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굴렘 위안부 만화전 … "눈물 난다, 이건 범죄"

중앙일보 2014.02.03 00:26 종합 2면 지면보기



프랑스 여성들 "그 어린 소녀를 …"
일본 방해에도 1만6000명 관람
"위안부 없다" 일본 현수막 철거돼



















지난달 31일 오전 프랑스 서부 소도시인 앙굴렘시의 앙굴렘극장 지하 전시관. 국내 유명 만화작가 19명이 ‘지지 않는 꽃:내가 증거다’를 슬로건으로 참여한 ‘위안부 한국만화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중 박재동 작가의 ‘끝나지 않는 길’(가로 2.2mX세로 20㎝)이란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그림 속 ‘나의 살던 고향’에는 봄기운이 완연하다. 초가집 담벼락을 따라 진달래, 개나리, 살구꽃이 소담스럽게 피었다. 그러나 마을 옆으로 좁고 붉은 길 하나가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고 그 길 끄트머리엔 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두른 단발머리 소녀가 서 있다.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고향을 등진 채로….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애끓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이 작품을 보던 프랑스인 아멜리에 주프(28·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프는 “어린 나이에 성노예로 생활했던 소녀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났다”며 “역사적 사실을 증언한 그분들의 용기를 기리기 위해서라도 이런 전시는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은 유럽 전역과 아시아의 다양한 나라가 참가해 ‘만화계의 칸 영화제’라고 불린다. 41회째인 올해는 제1차 세계대전 100주년을 기념해 당시 전시 상황과 여성 폭력을 테마로 정했다. 지난달 30일부터 2일까지 나흘간 전 세계 작가·테마별로 각각 35개 전시관이 개관돼 30개국 227개 출판사가 참여했다. 한국 부스에서 진행된 위안부 만화 기획전에는 박재동 작가 외에 김광성·정기영 작가(‘나비의 노래’), 이현세 작가(‘오리발 니뽄도’), 김정기 작가(‘꼬인 매듭’), 김금숙 작가(‘비밀’) 등의 작품 20여 점이 전시됐다. 일제의 만행을 성토하는 풍자만화 등이 주였다. ‘오리발 니뽄도’는 댕기머리에 한복을 입은 소녀가 칼을 들고 군국주의의 상징인 일본군을 밟는 모습을 묘사했다. 한지와 먹으로 표현한 97페이지의 만화 중 일부 컷을 공개한 ‘나비의 노래’는 위안부 할머니의 굴곡진 삶을 그렸다. 특히 24개의 액자를 일렬로 배치한 신지수 작가의 ‘83’은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액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갈수록 위안부 할머니가 소녀로 변해가는 모습을 표현했다.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부터 올해가 83년이 흘렀다는 의미를 작품 제목에 담았다. 프랑스인 테소니에 베로니크(52)는 “아픔 없는 어린 시절로 할머니를 데려다주고자 한 작가의 마음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김광성 작가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마음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진실을 알린다는 데 많은 의미를 두고 있다”고 밝혔다.



 1991년 위안부 사태를 최초 증언한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끝나지 않은 이야기’도 관람객의 심금을 울렸다. 에마뉘엘 라트헤이(44·여)는 “같은 여성으로서 화도 나고 안타까워 눈물이 났다”면서 “14살, 16살에 불과한 어린아이들을 성 노리개로 삼았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범죄”라고 말했다. 한국만화연합과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여성가족부가 1년여간 공들여 준비한 전시회에는 나흘 동안 1만6000여 명이 몰려들었다.



 전시회 기간 동안 프랑스 미술사학계의 권위자인 라파엘 퀴르 국제미술평론가협회장이 만화 전시장을 찾았다. 여성 인권·미술사학계의 세계적 전문가인 그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국제사회에 자신의 피해를 얘기할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했다”며 “생존해 계신 할머니들에겐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바로 지금 올바른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고 말했다.



 퀴르 회장은 또 “한국 정부로선 위안부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며 “정치적·외교적 접근도 좋지만 만화를 활용한 이번 경우처럼 다양한 방식의 문화적 접근이 더욱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전시회에 대한 일본의 방해도 집요했다. 극우단체 ‘나데시코 액션’ 등이 앙굴렘 조직위에 개막식 당일까지 “전시회를 취소하라”는 탄원서 1만6000여 통을 보냈다. 또 ‘위안부에 대한 조작된 역사’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내건 부스를 설치했지만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조직위로부터 철거당했다. 그러자 일본 측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했다”고 반발했다. 이에 대해 퀴르 회장은 “역사적인 팩트에 근거하지 않은 이번 사안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한편 조직위와 앙굴렘시는 한국의 전시 작품이 훼손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앙굴렘 경시청 소속 사복 경찰 8명을 전시장에 상시 배치하는 등 한국의 입장을 최대한 배려했다. 프랑스 만화 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큰 일본이지만 역사적 진실의 물줄기를 바꾸지는 못했다.



앙굴렘=이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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