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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체력'갖춘 한국·중국·대만은 외풍 덜 할 듯

중앙일보 2014.02.03 00:02 경제 2면 지면보기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움직임에 터키 리라화의 가치가 급락하자 터키가 파격적인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터키 중앙은행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임시 통화정책위원회를 열고 기준금리를 4.5%에서 10%로 5.5%포인트나 올렸다. 이스탄불의 시민들이 스마트폰으로 환율 전광판의 사진을 찍으며 환율 변동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이스탄불 AP=뉴시스]


신흥국 위기가 깊어지고 있다. 페소화 가치가 하루 만에 13% 급락한 일명 ‘아르헨티나 쇼크’로 빨간불이 켜진 신흥국 시장이 설 연휴 기간 또 한 번 몸살을 앓았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월 750억 달러인 양적완화 규모를 650억 달러로 줄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인도와 터키·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신흥국이 발 빠르게 금리를 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달에만 신흥국 주식시장에서 122억 달러 규모의 자금이 빠져나갔다. 이들 나라에 돈을 묻어두고 있는 투자자들의 근심도 커지고 있다. 아시아 신흥국 관련 리서치 및 펀드 운용을 담당하고 있는 증권사 해외법인장들로부터 전망을 들어봤다.

자산운용사 해외법인장이 본 신흥국 위기



 “‘양(Quantity)의 장’에서 ‘질(Quality)의 장’으로 변했다. 유동성이 아니라 각국의 경제 기초체력(펀더멘털)이 좌우하는 시장이 열린 것이다.”



 신흥국 위기를 진단하는 본지의 설문에 응한 4개 자산운용사 해외법인장과 현지 최고운용책임자(CIO)들의 총평이다. 어느 나라건 투자자들은 가까운 나라에 많이 투자한다. 정보의 양이 많고 질도 높기 때문이다. 일명 홈바이어스 현상이다. 국내 자산운용사들이 홍콩이나 싱가포르에 법인을 세우고 아시아 신흥국에 대한 리서치 및 관련 펀드 운용을 맡기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신흥국, 특히 아시아 신흥국에 관해선 이들만 한 전문가는 없다. 그런 이들이 꼽은 신흥국 위기의 원인은 바로 유동성 고갈이었다.



 돈을 마르게 한 건 미 연준의 양적완화 축소다.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이 정부 국채나 다른 금융자산을 사들여 시장에 통화량을 공급하는 것이다. 자국 통화가치를 떨어뜨려 수출 경쟁력을 높이고 일정 정도의 인플레이션을 유도해 경기침체를 막기 위한 정책이다. 세 차례에 걸친 미국 양적완화 정책으로 시중에 유통되는 달러화가 늘어나면서 신흥국 시장도 수혜를 누렸다. 특히 수입 의존도가 높은 신흥국에선 달러 약세에 따라 환율이 상승하면서 물가상승 압력이 줄었다.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 역시 감소했고, 성장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투자와 소비가 늘고 이는 경제성장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추가 자금이 유입되는 선순환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실력이 아니라 외부의 힘에 기댄 성공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법이다. 이무광 트러스톤자산 싱가포르법인장은 “유동성으로 만들어진 선순환 구조는 유동성이 사라지는 순간 악순환 구조로 바뀐다”며 “경상수지 적자 폭이 크고 민간과 정부의 부채 비율이 높은 나라는 유동성 고갈을 견디지 못한다”고 말했다. 터키와 아르헨티나같이 최근 위기가 불거진 신흥국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사실 지난해 5월에도 신흥국들이 같은 이유로 홍역을 치른 적이 있다. 버냉키 쇼크다. 당시엔 미 연준이 양적완화 정책을 유지하기로 결정하면서 사태가 진정됐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미 연준은 아르헨티나 쇼크에도 양적완화 규모를 추가로 축소했다. 미국 경기가 살아날수록 양적완화 규모는 줄 수밖에 없다. 최종적으로는 양적완화 정책 자체가 종료될 때까지 주기적으로 신흥국 위기설이 불거질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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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모든 신흥국이 위기에 빠지는 건 아니다. 돈이 많을 땐 위험에 둔감해진다. 지갑 속에 돈을 묻어놓느니 펀더멘털이 좀 떨어지는 나라에라도 투자해 수익을 내는 편이 낫다고 여긴다. 하지만 여윳돈이 줄면 위험 회피 경향이 뚜렷해진다. 펀더멘털을 꼼꼼히 따져 안전하면서도 수익이 날 만한 나라를 골라 투자한다. 경상수지 흑자국, 제조업 중심의 수출 주도형 산업 구조를 가진 나라, 단기 외채 대비 외환보유액이 안정적인 국가에 대한 투자는 상대적으로 덜 줄어든다는 얘기다. 유재성 삼성자산 홍콩법인장은 “중장기적으로 경상수지 적자국이 많은 중남미와 흑자국이 많은 아시아는 다른 길을 갈 것”이라며 “인구와 소득 증가 측면에서도 아시아는 내수 진작의 여력이 크고 중남미 대비 저평가 매력도 있다”고 말했다. 유 법인장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외환보유액 상위국인 중국과 대만·한국을 투자 유망 국가로 추천했다. 2일 기자들과 만난 신제윤 금융위원장 역시 “앞으로 각국은 기초체력에 따라 다른 평가를 받을 것”이라며 “미 연준의 양적완화 축소가 한국에 미칠 단기 충격은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시장 내 유동성이 줄면 상대적으로 선진국 투자가 주목을 받는다. 펀더멘털이 아무리 탄탄해도 선진국보다 안전한 신흥국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위험은 곧 저수익을 뜻한다. 장기적으로 고수익을 얻으려면 성장의 여지가 큰 신흥국에 대한 투자를 접을 순 없다. 김병하 미래에셋 홍콩법인 CIO는 “선진국에 쏠린 자금이 중장기적으론 신흥국으로 다시 이동하게 돼 있다”며 “지금의 조정은 신흥국에 대한 투자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동성의 장에선 시장 전체가 고르게 오른다면 펀더멘털의 장에선 선별적으로 오르는 현상이 나타난다. 박명주 한국투자신탁 홍콩법인장은 “장의 성격이 바뀐 만큼 시장 인덱스를 추종하는 상품보다 펀드매니저가 종목을 골라 추가 수익을 내는 액티브 상품이 유리하다”고 말했다. 대형주보다 중소형주 중심으로 포트폴리오가 짜인 상품을 추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 법인장은 “단기적으론 신흥국 시장은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다”며 “중장기적 관점에서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선언·이한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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