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광 4만여 명 북적 인구 7500 산골 마을이 리틀 할리우드로 변신

온라인 중앙일보 2014.01.26 11:14
1 16일 열린 개막 기자회견에 나온 로버트 레드퍼드. 자신의 출연작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에서 이름을 따 1981년 선댄스 영화제의 모태가 된 비영리기관 선댄스 인스티튜트를 창립했다.



30년 된 미국 독립영화의 산실 선댄스 영화제

2 개막 기자회견에 참석한 선댄스 3인방. 왼쪽부터 존 쿠퍼 영화제 집행위원장, 케리 퍼트넘 선댄스 인스티튜트 디렉터, 로버트 레드퍼드.
미국 서부 내륙에 있는 유타주 파크 시티(Park City). 해발고도 2000∼3000m에 달하는 지형적 특성을 이용해 미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스키 리조트 3곳이 성업 중이다. 2002년 솔트 레이크 겨울올림픽 당시 여기서도 경기가 열렸다.



하지만 인구가 고작 7500여 명인 이 소도시가 유명해진 이유는 따로 있다. 미국 독립영화의 산실로 자리 잡은 선댄스 영화제다. 해마다 1월이면 파크 시티는 할리우드 스타들이 앞다퉈 찾는 ‘리틀 할리우드’로 변신한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극장 개봉으로 큰돈을 벌어줄 ‘대어’를 낚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다.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걸 의식한 기업들은 공짜 판촉물을 앞세워 치열한 홍보 경쟁을 펼친다.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레드퍼드가 1981년 비영리기관인 선댄스 인스티튜트를 설립해 85년 영화제를 이끌기 시작한 지 올해로 30년. 16일부터 26일까지 열흘간 열린 선댄스 영화제 현장을 찾았다. 젊음과 열정으로 요약되는 ‘선댄스 스피릿’이 넘치는 그곳에선 30년을 거치며 굳건히 뿌리를 내린 ‘선댄스’의 브랜드 파워를 실감할 수 있었다.



3~4 영화제가 열리는 파크 시티. 미국 톱10 스키장 중 3곳이 파크 시티에 있다. 5 메인 스트리트에 위치한 상영관 이집션 시어터. 6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선댄스 채널 헤드쿼터. 선댄스 채널은 영화제의 주요 스폰서다.




7 메인 스트리트에선 사람들이 유명인들의 사진을 찍는 풍경을 자주 볼 수 있다. 8 영국의 유명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Banksy)가 올해 영화제 개막 직전 남기고 간 낙서그림. 9 영화제 안내책자를 살펴보는 유타 주민.


격식은 내 던져라 … 필요한 건 자유로운 영혼

“정장이나 구두는 가져갈 필요 없어요. 입을 일이 없을 거예요.” 출장가기 전 통화한 영화제 관계자의 귀띔이었다. 공식 상영이 열리는 날이면 남자는 양복(턱시도), 여자는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칸 영화제가 떠올라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실제로 가보니 과연 그랬다. 스틸레토힐 대신 뭉툭한 스노 부츠, 등 파인 드레스 대신 두둑한 파카와 털모자. 눈 덮인 산비탈을 배경으로 열리는 선댄스 영화제의 ‘드레스 코드’다. 16일 열린 개막 기자회견에 나온 로버트 레드퍼드도 점퍼와 스웨터, 청바지 차림이었다. 밤마다 열리는 각종 파티에서도 화려한 옷차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연일 영하를 기록하는 날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권위보단 실용, 개인의 개별성과 자유로운 사고를 중시하는 선댄스 특유의 DNA 때문”이라는 영화제 관계자의 설명이 더 와닿았다. 스타들의 의상도 소탈했고 레드카펫 행사도 간소했다.



선댄스는 권위로부터 자유롭다. 레드카펫 위의 스타나 거장 감독보다는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새로운 것을 접하길 원하는 목마른 영화인과 관객이 대접받는다. 이는 창립자 로버트 레드퍼드가 선댄스 인스티튜트를 설립할 때부터 내세웠던 ‘독립영화를 보호하고 육성한다’는 목표가 타협 없이 이어져 왔기에 가능했다. 지난해 ‘서클즈(Circles)’로 월드 시네마 드라마 부문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던 세르비아 출신 감독 스르단 골루보비치는 “나처럼 작은 나라에서 온 독립영화 감독이 오로지 작품성만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선댄스다. 그런 점이 선댄스를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제로 자리 잡게 했다”고 말한다. 작품성 외엔 그 무엇도 신경 쓸 필요가 없기에 선댄스는 과감하다. 독립영화 감독의 첫 작품도 서슴없이 발탁한다. ‘저수지의 개들’의 퀜틴 타란티노,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스티븐 소더버그가 그렇게 스타로 탄생했다. 올해 선댄스에서 상영된 장편 120여 편 중 54편이 데뷔작이다.



지난 5년간 거둔 경제효과 4000억원

흔히 영화제 같은 문화 행사는 이윤 창출과는 거리가 멀다고들 하지만 선댄스는 예외다. 유타대가 발표한 2013년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선댄스 영화제가 지난 5년간 거둔 경제 효과는 지난해의 7000만 달러(약 750억원)를 포함해 총 3억7500만 달러(4000여 억원)에 이른다. HP와 아큐라(혼다의 고급차 브랜드), 체이스 은행, 선댄스 채널 등 든든한 스폰서들과 기관·개인 후원자들이 1300만 달러가 넘는 영화제 1년 예산을 책임진다. 영화제와 기업의 관계도 비교적 잘 정립돼 있다. 기업은 영화제를 후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홍보 효과로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유타주 역시 연간 30만 달러(3억2000여만원)를 영화제에 지원하지만 작품 선정이나 스태프 고용 등 운영 전반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 영화제가 유타주의 이미지 향상에 미치는 영향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영화제에 관한 모든 결정은 선댄스 인스티튜트의 몫이다.



해마다 선댄스를 찾는 관객은 4만5000여 명. 70%가량이 유타주 바깥에서 오며 이 중 약 4000∼6000명이 해외 관객이다. 규모로만 따지면 연간 20만 명이 오는 부산국제영화제보다 못하지만 충성도만큼은 대단하다. 영화제 기간 중 하룻밤 최고 700달러 선까지 껑충 뛰어오르는 파크 시티의 호텔 숙박요금도 해가 바뀔 때마다 거듭해서 찾아오는 관객들의 열정을 꺾진 못한다. 1800명에 달하는 자원봉사자들은 말 그대로 미국 방방곡곡에서 온다. 관객의 74%가 대학 졸업자이고 40%가량이 연간 가구 소득 10만 달러(약 1억1000만원)에 달하는 ‘고학력 고소득 관객’이란 점도 흥미롭다. 요컨대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다른 문화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곳이 선댄스다.



오전 8시30분부터 다음날 오전 2시까지 릴레이 상영이 이어지고 전문가 못지않은 식견을 자랑하는 열혈 관객과 이에 더없이 진지하게 반응하는 영화인들 사이의 토론이 밤을 잊은 채 계속된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리 높여 토론을 하게 되고 그래서 이튿날 공식석상에 나온 감독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는, 이른바 ‘선댄스 보이스(Sundance voice)’도 이런 열정의 산물이다.





새벽까지 토론 열기 … 아침이면 ‘선댄스 보이스’

할리우드 스타들이 독립영화를 통해 연기 스펙트럼을 과시하는 관행이 만들어진 것도 선댄스의 성과 중 하나다. 배우 입장에선 작품성 있는 독립영화에 출연할 경우 기존과는 다른 면모를 부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감독 입장에선 스타가 출연하면 제작비를 조달하기가 한결 쉬워진다는 점에서 ‘윈윈’이 된다. 올해도 할리우드 스타들이 앞다퉈 선댄스에 얼굴을 비췄다. 하나같이 이번 출연작에 대해 “모험이었고 도전이었다”고 말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캠프 엑스레이(Camp X-ray)’에서 관타나모 기지 포로와 교감을 나누게 되는 미 해군으로 변신해 호평을 받았다. ‘레미제라블’에서 이미 노래 실력을 보여줬던 앤 해서웨이는 직접 노래 부른 음악영화 ‘송 원(Song One)’을 들고 왔다. ‘오만과 편견’ ‘캐리비안의 해적’의 키라 나이틀리와 ‘킥애스’의 클로이 모레츠는 ‘래기즈(Laggies)’에서 공동주연으로 의기투합했다. 이 밖에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 일라이자 우드, 마크 러팔로, 매기 질렌할 등이 출연한 저예산 영화들이 소개됐다. 지난해 선댄스에서 ‘비포 미드나잇’을 상영해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 냈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12년간 촬영한 이선 호크 주연 ‘보이후드(Boyhood)’로 다시금 화제가 됐다.



극영화에 비해 주목도가 떨어졌던 다큐멘터리를 상품화한 것도 선댄스의 족적이다. 지난해 말 뉴욕 타임스는 ‘선댄스 가는 곳에 아카데미도 간다(Where Sundance goes, Oscars follow)’는 기사에서 올해 선댄스에 출품된 다큐들을 눈여겨볼 것을 주문했다. 지난해 아카데미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장편)을 받은 ‘서칭 포 슈거맨’은 선댄스에서 처음 소개됐던 작품. 3월 열리는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 다큐멘터리 부문 1차 후보작 15편 중 5편도 선댄스 데뷔작이다. 영화제 대변인 겸 선임 프로그래머인 캐럴라인 리브레스코는 “다큐는 그동안 성장세나 잠재력에 비해 칸이나 베를린 등 다른 큰 영화제들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던 분야였다. 80∼90년대 선댄스 영화제가 독립영화인들에게 그랬듯 이번에도 탁월한 재능을 가진 다큐 감독들의 부름에 제대로 응답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기 TV 드라마 ‘매드맨’의 주연배우 존 슬래터리가 연출한 ‘갓스 포켓(God’s Pocket)’






선댄스서 데뷔 다큐 5편, 아카데미 다큐상 후보에 올라

“예술가들의 역량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데 할리우드에선 더 이상 그걸 보여줄 여지가 없다”는 이유로 선댄스 인스티튜트를 만들었던 로버트 레드퍼드. 그의 ‘선댄스 스피릿’을 같은 이름의 케이블 채널이 공유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레드퍼드는 영화제의 취지를 더 많은 관객에게 알리기 위해 96년 선댄스 채널을 만들었다. 2000년대 후반 미국의 케이블 채널 AMC 네트워크가 인수해 덩치가 한결 커진 선댄스 채널은 선댄스 영화제의 주요 스폰서이자 해마다 영화제 기간에 맞춰 전년도 화제작 10편을 방영하는 홍보대사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브루스 터크먼 AMC/선댄스 채널 글로벌 대표는 “레드퍼드는 할리우드 주류 영화에 식상함을 느끼고 새롭고 질 높은 콘텐트를 찾던 관객들의 욕구를 읽어내 문화적 지평을 넓혔다. 선댄스 채널은 그런 레드퍼드와 선댄스의 정신을 공유하며 고품질 문화 콘텐트의 관객층을 한국을 포함해 전세계적으로 넓히는 시너지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30년 전 레드포드가 간파했던 새로운 예술과 문화에 대한 갈망은 현재진행형이다. 뉴욕도 LA도 아닌 무명의 소도시 파크 시티에 오늘날 전세계 관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파크 시티(미국 유타주) 글·사진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사진 선댄스 인스티튜트, 외신종합



오피니언리더의 일요신문 중앙SUNDAY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아이폰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아이패드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 폰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 탭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앱스토어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마켓 바로가기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