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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득의 패러디 파라다이스] 리어 옹

중앙선데이 2014.01.25 18:08 359호 30면 지면보기
없어. 기억이 없어.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거야.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 온 게 3년이 지났으니 하루에 한 번만 눌렀다고 해도 그렇지 천 번은 눌렀을 거 아니야. 그러면 머리는 잊었어도 몸은, 손가락은 기억하고 있을 거 아니야. 그런데 기억이 안 나. 아주 깜깜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다리에 힘이 빠져서 그만 주저앉아 애처럼 울고 싶더라니까. 현명해지기 전까진 늙지 말았어야 했어.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정신을 집중해서 다시 몇 번을 시도한 끝에 결국 문이 열렸어. 아니. 며느리가 열어준 거지.

그날 저녁에 며느리가 아들놈에게 하는 말이 내가 치매에 걸린 것 같다는 거야.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게 치매야. 혼자 중얼거렸지. 제발 날 놀리지 마시오. 난 대단히 어리석고 멍청한 노인이오. 한 시간도 안 빼놓고 팔십이 넘었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온전한 정신이 아닐까 두렵소. 늙는다는 건 자꾸 없어지는 거야. 없음은 없음만 낳아. 돈도 건강도 사람도 없어지지. 그래서 빈곤과 질병과 고독이 노인의 3대 문제라는 거 아니야. 그런데 치매는 기억과 말과 판단력을 빼앗지. 인간의 존엄을 완전히 말살하는 거야.

고마워. 새삼스럽게 생일은 무슨. 이렇게 우리끼리 밥이나 한번 먹자는 거지. 새해도 되고 했으니까 말이야. 요즘 셰익스피어 그 사람이 쓴 『리어 왕』을 읽고 있는데 꼭 내 모습 같아. 내 꼴이 딱 그래. 우리 아들 효자지. 착해. 부모라고 모시고 살잖아. 고맙다 생각하며 사는 거지. 애들이 지금 아파트 살 때 내가 보태긴 했지. 내가 갖고 있는 전 재산 다 주었어. 원래 내 재산이 별로 많지 않았어. 난 그 아이를 사랑했고 그 따뜻한 보살핌에 다 맡길까 생각했었어. 노인이 무슨 돈이 필요하겠나. 그저 매달 용돈이나 타 쓰면 되는데. 그렇게 생각했지. 처음엔 당당했는데 갈수록 눈치가 보여. 며느리도 착해. 눈치를 주는 건 아닌데.

이번에 내가 그랬지. 아들놈에게 돈 좀 달라고. 그런데 이 녀석이 매달 용돈을 드리는데 무슨 돈이 또 필요하냐고? 오, 필요를 따지지 마! 가장 천한 거지들의 쓸데없는 물건에도 여분은 있는 법. 인간에게 본능만 채우라고 한다면 사람 목숨 짐승 값이 아니냐. 자네들도 다 알겠지만 그 용돈이라는 게 너무 빠듯해요. 서예교실 다니고 친구들과 밥 먹고 차 마시고 약주 한잔 하고 결혼식, 장례식 가서 부조하고 손주 용돈 주고 이발하고 목욕탕 가고 책 몇 권 사면 없어. 구구절절 말하진 않았지만.

아들놈이 자기도 용돈 타 쓰는 처지라면서 나보고 며느리한테 직접 말해보라고 하는 거 아닌가. 내 자식이지만 얼마나 못나고 밉던지. 지가 말해서 받아주면 좋잖아. 시아버지 체면에 그걸 꼭 말해야 하나. 궁핍이란 이상한 재주가 있어서 결국 말했지. 며느리가 돈을 주는데 그 표정을 자네들도 한번 봤어야 하는데. 아버님도 필요하시겠죠. 저희도 더 드리고 싶지만 아시잖아요. 벌이는 시원찮고 아이들 교육비에 생활비 빠듯하게 살고 있는 거. 지금 가진 현금이 이것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돈 2만원을 주더라니까. 서예교실 친구가 열 명인데 그 돈으로 무슨 밥을 사겠나? 신들이여, 이 불쌍한 노인이 보이지요. 나이만큼 근심에 찬, 둘 다 많아 비참한. 2만원 도로 돌려줬어.

없어. 오늘 밥값이.

** 컬러 부분은 모두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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