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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실탄 적은 아르헨·터키, 투기자본 1차 표적

중앙선데이 2014.01.26 01:08 359호 20면 지면보기
자료: 블룸버그·FT (외환보유액은 지난해 4분기(일부 3분기), 증시·환율은 23일 기준)
두 차례 오일쇼크를 겪은 뒤인 1979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폴 볼커 의장이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11%였던 정책금리를 2년 만에 20%로 올렸다. 고수익을 좇아 전 세계로 흩어졌던 달러가 미국으로 역류했다. 2년 뒤 멕시코가 먼저 나가떨어졌다. 이른바 ‘데킬라 위기’다. 미국·유럽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농산물 수출로 흥청망청했던 남미에서도 도미노처럼 디폴트(국가부도) 선언이 이어졌다.

벼랑 끝에 선 신흥국, 외환위기 악몽 재연되나

85년 플라자 합의 후 10년 동안 달러는 다시 양의 얼굴로 아시아와 러시아를 유혹했다. 석유·가스 부국 러시아 유전 개발에 달러가 몰렸다. 아시아 각국은 저달러·저금리·저유가라는 ‘3저(低)’ 호황 덕을 톡톡히 봤다. 그러나 94년 Fed 앨런 그린스펀 의장이 금리 인상을 선언하면서 다시 한번 달러 역류가 일어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자축하던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2008년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시작된 Fed의 초저금리 정책과 세 차례 양적완화 정책은 신흥국에 다시 한번 달러 단비를 내렸다. 미국 국채 수익률이 2% 아래로 떨어지자 10% 넘는 수익률을 보장해준 터키의 공항과 칠레의 지하철 건설사업에 달러가 몰렸다. 미국보다 10년 앞서 외환위기를 겪은 신흥국은 2008년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살려냈다.

고속성장을 한 중국이 국제 원자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자 수출의 대부분을 원자재에 의존한 신흥국은 달러 홍수를 만났다. 석탄·석유·가스·고무·원목이 풍부한 인도네시아, 철강·콩·커피 부국 브라질, 구리의 나라 칠레, 세계 최대 플래티늄 생산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무역수지가 빠르게 흑자로 돌아섰다. 2006~2011년 인도네시아 수출액은 840억 달러(약 93조원)에서 2040억 달러로 2.4배가 됐다. 칠레는 같은 기간 구리 수출로 연평균 115억 달러를 벌었다.

그러나 지난해 6월 벤 버냉키 Fed 의장의 양적완화 축소 선언으로 달러가 다시 역류하자 신흥국의 허약 체질이 그대로 드러났다. 국제투기자본이 노리는 첫 표적은 외환보유액이 적은 국가다. 하이에나가 달려들어도 쏠 ‘실탄’이 없는 곳이다. 터키가 가장 먼저 매를 맞은 건 이 때문이다. 지난해 말 터키의 외환보유액은 1370억 달러. 단기외채와 경상수지 적자 합계액 1500억 달러에 훨씬 못 미친다. 외환위기가 시작되면 1년도 못 버틴다는 얘기다.

아르헨티나 페소화가 급락한 것도 외환보유액이 7년 만에 최저치인 300억 달러 아래로 떨어졌다는 허점이 노출됐기 때문이다. “페소화는 끄떡없다”며 페소화 방어에 나섰던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조차 시장 개입을 중단했다. 일촉즉발의 위기 순간에도 국내 정치에 발목 잡혀 헛발질만 해대는 정부의 무능력도 닮은꼴이다. 터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정부는 리라화 급락에 대응해 금리를 올리라는 IMF 경고에 “금리를 올려 터키 경제성장을 꺾으려는 국제투기자본의 음모”라고 일축했다. 23일 아르헨티나 페소화 급락 사태도 근본적 대책 없이 외환 통제만 강화하고 나선 정부 대책에 시장의 불신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살생부에 오른 신흥국 대부분은 극심한 정치 불안 속에 올해 큰 선거까지 앞두고 있다. 터키와 인도네시아는 각각 3월과 4월에 총선을, 8월과 7월에 대선을 치른다. 브라질은 10월에 대선을, 남아공과 인도·헝가리가 봄에 총선을 앞두고 있다. 통화가치가 연일 추락하고 있는데도 악수만 잇따라 둬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환종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에 맞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면 통화 긴축과 과감한 구조조정이 불가피한데 대부분의 신흥국이 선거 때문에 정반대 대책만 내놓고 있다”며 “정치마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대외 여건도 신흥국에 호의적이지 않다. 중국 경기엔 이미 빨간 불이 들어왔다. 지방정부가 벌여온 대규모 SOC 투자가 대거 부실화하면서 속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방정부의 빚을 정리하자면 성장에 브레이크를 거는 건 불가피하다. 이는 국제 원자재 가격 약세로 이어져 신흥국엔 악재다. 28~29일(현지시간) 올해 첫 통화정책 결정기구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를 앞둔 Fed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변수다. 애초 월가는 Fed가 현재 750억 달러인 양적완화 규모를 100억 달러 더 줄일 것으로 점쳤다.

그러나 아르헨티나·터키에서 촉발된 신흥국 외환위기와 중국의 경기 둔화 조짐이 새 변수로 떠올랐다. FOMC가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에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아르헨티나·터키는 더 궁지에 몰린다. 불안한 눈빛으로 Fed를 바라보고 있던 달러가 본격적인 엑소더스에 나설 수 있다. 이는 24일 나타난 것처럼 미국·유럽 증시 급락으로 이어져 미국 경기 회복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더 이상 Fed가 미국 국내 경기만 보고 테이퍼링 속도를 조절할 수 없게 됐다는 얘기다.

신흥국 위기의 파장은 엉뚱한 곳에 불똥을 튀기기도 했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밀어붙이고 있는 ‘아베노믹스’엔 제동이 걸렸다. 신흥국 통화가치가 떨어지면서 안전자산인 일본 국채로 돈이 몰리는 바람에 아베노믹스의 엔진인 ‘엔저 기조’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엔저로 비상이 걸렸던 한국 수출기업은 한숨 돌릴 여지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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