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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칼럼] 더함도 덜함도 없이 … 삶 어루만지는 평온함

중앙선데이 2014.01.26 02:03 359호 27면 지면보기
독일 출신 테너 크리스토프 프레가르디엥(1956~)은 가곡, 모차르트 오페라, 바로크 종교음악에 능하다. [Marco Borggreve]
좀 뜬금없는 베토벤의 밤일지라도 사람들은 그러려니 했다. 벌서는 기분으로 이 악물고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덕에 3중 협주곡 한 악장 정도는 소화할 수 있었다. 더 심할 땐 쇼스타코비치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 전곡을 견디고 나서 그로기 상태에 빠진 좌중을 목도해야 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전혀, 불가능해져 버렸다.

프레가르디엥의 슈베르트 가곡

무슨 말인지 설명이 필요하겠다. 아무리 홀로 고독에 몸부림친다 해도 내 작업실 줄라이 홀의 연말·연초 풍경도 각종 모임으로 번다해진다. 올해에 비해 작년, 재작년 혹은 지난 20여 년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곰곰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 변화가 있다. 고전음악 또는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이른바 ‘수준 높은’ 음악을 전혀 틀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전 방문객들은 평소 전혀 관심이 없었어도 주인장 강권으로 이른바 고상한(!) 풍악을 울릴라치면 잠시 들어주는 척이라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다양한 성분의 인간들이 한결같이 더 이상 ‘교양스러운(?) 척’을 거부한다.

“야, 가요 틀어 가요! 김광석, 김현식 없냐?”

가요가 아니라면 아바, 로보, 닐 다이아몬드쯤 되는 추억의 팝송이라야 용서가 된다. 평생 미완성 교향곡만 듣기로 결심한 듯 매년 ‘슈베르트 미완성’을 부르짖는 정관용 때문에 여러 해째 단골 레퍼토리가 됐었는데 그나마 올해는 목소리 큰 신율의 강력한 제동으로 최희준의 ‘옛이야기’‘하숙생’ 쪽으로 넘어가야 했다. 최희준 다음으로 김추자, 사월과오월, 금과은이었으니 불쌍쿠나 슈베르트여.

편견, 우열, 위계 질서…. 내가 끔찍이 싫어하는 단어들이다. 그런데 혹시 내 안에 그런 것이 심해서 더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베스트셀러를 쏟아내는 정유정, 김진명에 비해 같은 소설가 타이틀을 달고 있어도 성석제, 배수아를 다르게 여기는 편견이 내 안에 있다. ‘가문의 영광’ ‘조폭 마누라’보다는 홍상수를, 크리스토퍼 놀란보다는 조엘 코언이나 다르덴 형제를 더 특별히 여기는 편견의 시선이 내 안에 있다. 식견인지 겉멋인지 그냥 확 취향의 갑옷을 벗어버려?

이번 겨울에도 빈센트가 뮌헨에서 날아왔다. 한국에서 클래식 음악 애호는 괴롭도록 고상 화상의 딱지가 붙어야 하지만 유럽의 현역 건축가 빈센트에게 그런 취향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더욱이 그는 고수 중의 상고수다. 지난해 그는 내게 피아니스트 소콜로프의 비범함을 알려주고 갔다. 턱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빈센트가 전수해준 올해의 인물은 테너 크리스토프 프레가르디엥(Pregardien)이다. 그가 들어본 가장 예술성 뛰어난 성악가란다. 2010년에 내한공연도 한 인물인데 한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때 공연 홍보물 타이틀이 이렇다. ‘보스트리지의 감수성과 디스카우의 노련함이 적절히 배합된 최고의 가곡 전문 연주자’. 약장수 광고 같지만 실제 들어보면 꽤 근거 있는 언급이라고 느껴진다. 애잔한 보스트리지, 견고한 디스카우, 이 두 사람의 장점만을 잘 섞어놓은 듯하다고 할까.

유튜브에서 프레가르디엥의 공연 장면과 생활상, 인터뷰 등을 찾아봤다. 딱 독일 교양계층의 안정감과 정제미를 갖추고 있다. 전혀 과잉이 없는 균형감, 미려한 소리의 울림, 부친 못지않게 각광받는 음악가 아들과 세련된 부인의 면모까지 더해져 그는 삶의 평온함을 전해 주는 음악가다. 2008년에 출시된 슈베르트 ‘백조의 노래’와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작은 사진)’ 음반으로 전 세계의 주요 음반상을 휩쓸기도 했다. 한 인터뷰 영상에서 그는 말한다. “슈베르트 가곡은 자기 연민의 노래입니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미학으로, 김수영의 풀잎을 서정으로 바라볼 수 없듯이 슈베르트 가곡을 아름다움으로만 접할 수는 없다. 지극한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프레가르디엥에게서 ‘자기연민’의 파토스를 공감할 수 있을 때 그를 사랑할 수 있으리라.

최희준과 프레가르디엥이 뒤섞이면서 한 겨울이 경과한다. 생각해 보니 그 둘의 낙차가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지 모르겠다. 가곡에 대한 가요의 절대적 우세를 편하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다들 취향에 대해 떳떳하고 적나라해져 간다. 익숙지 않은 것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익숙한 것을 통한 편안함을 찾는다. ‘예술? 뭔 개소리야. 우리 가요가 어때서!’ 하는 주장도 흔히 들린다. 이와 더불어 특별하고 고단한 추구의 고통에 대한 관심과 존중도 사라져 간다. 그보다는 나의 즐거움, 나의 편안함이 훨씬 우위에 놓인다. 그것은 감각의 우위, 욕망의 우위, 자기 충족의 우위 혹은 비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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