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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맑고 담담하고 단순하게

중앙선데이 2014.01.26 02:05 359호 27면 지면보기
오랜만에 눈이 내리니 춥기는 하지만 마음이 편안하다. 도시민들이 살기엔 춥지도 않고 눈도 안 내렸으면 좋지만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적당히 눈이 쌓여야 풍년이 된다 하니 사는 모습에 따라 세상은 공평치가 않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나 뵌 선배님께 굴국밥을 사드리고 연초 인사를 나누는데 “올해는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라고 하셨다. 그래서 “왜 그런가요”라고 물으니 갑오년의 ‘오(午)’가 불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하늘에서 눈이 내리려다가도 따뜻한 기운에 물기가 사라져버린다고 했다.

좋아하는 계절이 모두들 달라 어떤 사람들은 꽃 피는 봄이 좋다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여름이 좋다고 한다. 난 두꺼운 옷을 입어도 하얀 낭만이 있는 겨울이 좋다. 살아가는 데 나름의 생존 비법(?)만 터득하면 한겨울을 잘 지낼 수 있다. 새해엔 여러 사람들이 복 받으라고 문자를 보냈고 이런저런 동영상도 보내왔지만 정성스럽게 보내온 덕담 편지는 없었다. 삶이 건조한 건지 이제는 그런 정감도 찾기 힘들다.

지난해 봄 섬진강 끝자락 광양에 매화꽃 필 때 나는 정기 선(禪)을 일주일간 다녀오면서 마음을 새롭게 다졌다. 선 기간에 저녁식사를 하며 원장 교무에게 제안을 했다. “교무님, 이 좋은 계절에 그냥 앉아 선만 할 수 있나요. 하루 날 잡아 매화꽃 향기 맞으러 남쪽으로 떠나게요.” 이튿날 우리는 김밥을 싸고 버스까지 전세 내서 매화나무 흩날리는 섬진강변에 다녀왔다. 앉아 있으며 명상한다고 마음이 온전한 것만은 아니다. 때로 계절에 순응하는 것도 삶의 여백이 향기롭기 때문이다.

선을 마친 후 마음도 맑게 담담해지자며 나만의 내규(內規)를 만들어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첫째는 저녁밥 먹고 8시가 넘으면 불빛을 작게 한 뒤 좌복에 앉아 한 시간 이상 조용히 선을 하고, 둘째는 음식을 담박하게 먹어 식탐하는 습관을 버리며, 셋째는 눈이 침침할 정도로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거였다.

언제부턴가 저녁 뉴스를 보면 마음이 우울해져 차츰 TV를 멀리했다. 그렇게 저녁 시간은 고요한 내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몇 개월 지난 어느 날, 앉았다 일어나려니 고관절이 조금씩 아팠다. 가까운 의원에서 X레이를 찍고 나니 의사가 물었다. “오랫동안 앉아 있었나요.” “네, 좌선을 좀 밤늦게까지 했습니다.”

의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제 그거 그만두세요. 나이가 들면 근육의 탄력성이 떨어져 고관절에 무리가 갑니다. 물리치료 하시고 쉬세요.” 문뜩 ‘육신도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나이가 됐나’라는 생각이 들어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 헐거운 육신 끌고 다니느라 애썼다”며 마음으로 몸을 위로했다.

또한 맛있다고 음식을 더 먹지 않는 습관은 어느새 내 마음 속에서 욕심이나 비교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했다. “먹는 걸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옛 수행자의 말처럼 그새 체중도 6㎏이나 줄었다. 책도 잠자기 전에 잠시 한 시간 정도 보는 습관을 들였다. 장터에서 국밥 먹다 만난 친구처럼 잠깐 스치듯 보니 책도 쉬고 나도 쉬는 일상이 되어갔고 마음도 한결 한가해졌다.

예전 어느 스님의 글을 읽다가 쪽지에 적어놓은 글이 생각난다. ‘세속을 벗어난 수도승들은 먼저 머리를 깎은 뒤 시계를 던져 버린다. 그 다음 부모에게 망배를 하고 목욕을 하며 인생을 다시 찾는다.’ 지극한 시간 속에 들어갈 때는 시계조차도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부처님 말씀에도 ‘쉬는 게 깨달음’이라 하지 않았던가.



정은광 원광대학교 미술관 학예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수행과 선그림(禪畵)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마음을 소유하지 마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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