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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학생 퇴학시키고 도피자금 몰래 대준 장멍린

중앙선데이 2014.01.26 02:25 359호 29면 지면보기
국민당 최대 계파 중앙구락부(CC)를 이끌던 천궈푸(陳果夫앞줄 가운데)와 함께 전국 대학교수 검정위원회를 마친 교육부장 시절의 장멍린(앞줄 왼쪽 다섯 번째). 1929년 4월 9일 난징(南京). [사진 김명호]
대시인 이백(李白)은 칭찬에 인색했다. 여자는 예외로 치고, 동시대 인물 중 유일하게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진압한 곽자의(郭子儀)의 공로와 겸손함을 노래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58>

1200년 후, 칭화대학 초대 총장을 역임한 뤄자룬(羅家倫·나가륜)은 주인도 대사 시절 네루를 만난 자리에서 “제2의 곽자의”라며 장멍린의 기백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문호 루쉰(魯迅·노신)과 막역했던 차오쥐런(曹聚人·조취인)도 장멍린을 극찬했다. “장멍린은 사내 대장부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부득이한 경우 가혹함도 서슴지 않았지만 뒤처리가 일품이었다. 루쉰과 후스(胡適·호적)도 이 점은 장멍린에게 미치지 못했다.”

1931년 가을, 공산당 소탕에 여념이 없던 장제스(蔣介石)는 만주를 일본군에게 통째로 내줬다. 학생들의 반일 시위가 잇달았다.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이 특히 심했다. 베이징대학 총장 장멍린은 칭화대학 총장과 연명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학교를 황폐화시키는 것 외에는 없다. 아무 효과도 없는 구국이나 애국활동을 중지하고, 즉각 교실로 돌아오기 바란다.” 애국운동 한다며 팔을 걷어붙인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갈 리가 없었다.

미국 유학 시절 존 듀이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며 가까워진 후스(오른쪽)는 죽는 날까지 장멍린의 지우(知友)였다. 1931년 베이징.
장멍린은 “나는 중화민국 국립대학의 총장이다.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겠다”며 학생운동을 지지하는 교수들부터 대학에서 내쫓았다. 프랑스 유학 시절 퀴리 부인의 연구실에서 방사선물리학을 전공한 쉬더헝(許德珩·허덕형), 중국 최초의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제조한 핵무기 전문가 덩자센(鄧稼先·등가선)의 장인과 대서예가이며 금석학과 훈고학의 대가인 마쉬룬(馬敍倫·마서륜)부터 퇴출시켰다. 학생 28명도 제적조치했다.

장멍린은 제 손으로 해직시킨 교수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사과했다. 워낙 싹싹 비는 바람에 쫓겨난 사람들이 도리어 장멍린의 처지를 위로할 지경이었다.

정부는 제적당한 학생들을 구속했다. 장멍린은 베이징 시장을 찾아가 담판을 벌였다. 학생들이 풀려나는 날까지 시장을 물고 늘어졌다. “국가의 기본정책을 충분히 이해시키지 못한 것이 잘못이다. 국토의 일부가 침범 당한 마당에 학생들이 저러는 건 당연하다. 한 명도 남기지 말고 내놔라.” 당시 시장에게는 이런 문제를 처리할 권한이 있었다.

시위 도중에 희생당한 학생들의 장례식도 손수 치렀다.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의 문집이나 회고록에 장멍린의 추도사가 자주 등장한다.

“총장을 하면서 남의 집 귀한 자녀와 국가의 동량들을 희생시켰다. 막아 보려고 기를 썼지만 결국은 이들을 구하지 못했다. 통곡 외에는 비통한 심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우리는 이리와 늑대의 포악함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권이 땅에 떨어지고 민중과 정부는 사사건건 대립한다. 옛 성인은 가혹한 정치가 맹수보다 포학하다고 말했다. 이 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통탄할 뿐이다.”

1933년에 들어서자 궁지에 몰린 중국공산당은 선전에 열을 올렸다. 좌경화된 학생들이 점점 늘어났다. 장멍린은 학비를 납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표적인 좌파 학생 9명을 퇴학시켰다.

장멍린의 이중성이 빛을 발했다. 퇴학당한 학생들에게 익명의 편지가 배달됐다. 동정 어린 내용과 300대양(大洋, 당시 중국의 화폐단위)짜리 수표가 들어있었다. 훗날 경제학자로 대성한 첸자쥐(千家駒·천가구)도 퇴학생 중 한 사람이었다. 1980년대 말, 홍콩에서 지난날을 회상할 때마다 장멍린의 얘기를 빼놓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그 돈을 누가 보내줬는지 모른다.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퇴학생들끼리 모여서 분석을 했다. 처음에는 공산당에서 보내준 줄 알았다. 공산당의 재정형편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회 저명인사들이 모금한 돈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이름과 정확한 주소를 알 턱이 없었다. 누군가 장멍린 총장이 아니면 이럴 사람이 없다고 하자 다들 동의했다. 퇴학시킨 사람도 장멍린이고, 위험에 빠질까 봐 빨리 떠나라고 돈을 보내준 사람도 장멍린이었다. 9명 모두 그 돈으로 독일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 선생의 양면성이 그립다.”

장멍린은 “학생들을 묘하게 선동하고 후배 교수들 등만 떠민다”며 좌파 교수들을 싫어했다. 항상 대립했다. 국민당 정부가 좌파교수 3명을 구속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장멍린은 후스와 함께 동분서주했다. 결국은 감옥에서 끄집어냈지만 다음날부터 학생문제로 또 싸웠다.

1935년 11월, 화북지방을 점령한 일본 군부는 장멍린의 영향력에 군침을 흘렸다. 대교육자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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