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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보엔 온기가 있다

중앙선데이 2014.01.26 02:42 359호 31면 지면보기
지난 10년간 한국은 인터넷 선진국으로 통했다. 세계 최초로 초고속 브로드밴드 가입이 대중화된 인구 5000만의 이 나라는 “세계에서 인터넷 연결이 가장 빠른 나라”로 통하곤 한다. 한국의 ‘모방자(모방 속도도 빠르다)’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인터넷 혁신에 있어선 많은 분야에서 앞서왔다. ‘새롬’이라는 기업은 스카이프 설립 3년 전에 ‘다이얼패드’라는 서비스를 만들었다. 페이스북 이전엔 싸이월드가 있었다.

한국 인터넷 매니어층이 가져온 가장 심층적 효과는 경제가 아닌 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 2002년 한국의 노무현 당시 대통령 후보가 인터넷 팬클럽 ‘노사모’ 열풍에 힘입어 쟁쟁한 경쟁자였던 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차로 따돌린 예는 유명하다. 노 전 대통령이 ‘시민 저널리즘’으로 태동한 오마이뉴스와 당선 첫 인터뷰를 했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토론의 장 역시 온라인으로 옮겨갔다. 한국의 트위터는 정치적 투쟁의 장이다. 한국인은 자신들의 이념에 맞는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을 할 수 있다. 보수들의 집합 장소인 ‘일간베스트’, 즉 ‘일베’의 경우 이제 고인이 된 노 전 대통령을 ‘위험한 공산주의자’라고 여길 듯하다.

이런 한국에서 최신 정치적 표현 수단이 구식의 펜과 종이라는 점은 의외다. 지난해 12월 10일 주현우라는 대학생이 자신이 다니는 고려대 정경대에 철도 파업과 밀양 송전탑 사태 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적어 대자보를 붙였다. 제목은 ‘안녕들 하십니까?’였다. 자신은 ‘사람이 먼저가 아닌, 이상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안녕하지 못하다’는 의미였다. 그 즉시 비슷한 내용의 대자보가 10여 장 넘게 붙기 시작했으며 전국적으로까지 확산됐다. 반대로 ‘우리는 안녕하다’는 내용도 있었다. 곧 주요 언론은 이 현상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1970~80년대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의 독재를 비판하던 학생운동 대자보를 되새기게 한다. 당시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은 중년이 됐고 그때는 일종의 ‘낭만이 있던 때’로 회자된다. 현재 트위터 등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젊은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대자보라는 매체에 이끌렸던 것일까.

지지자들은 대자보가 더 ‘진정한’ 소통의 수단이며 인터넷의 익명성이 없고 참여의 문턱이 높다는 점에 주목한다. 대자보는 공공장소에 붙여야 하며 대체로 자신은 누구인지를 밝히는 게 관례다. 사이버 전사들보다 용기가 더 많이 필요하다. 실명을 쓰는 것도 조작을 방지하는 안전장치로 작용한다. 한국 국가정보원이 지난 대선 당시 익명으로 반야당 댓글을 단 것으로 밝혀져 온라인 토론에 대한 의구심을 만든 것과 대조된다.

대자보의 언어는 온라인 포럼의 문법과는 다르다. 한국처럼 위계질서가 강한 사회에서 인터넷의 익명성은 과장의 어법으로 점철되지만 대자보는 진정성이 담겨 있다.

50년 전만 해도 한국은 공동체 중심의 농경사회였으나 오늘날은 도시적 소외 및 개인주의가 만연했다. 온라인 소통은 이런 공동체 의식의 파괴를 때로는 가속화시키고, 확대시켰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질문엔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옛 한국’의 가치, 즉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고 타인을 배려하는 가치가 녹아 있다.

종이 대자보가 유행하고 있다는 건 한국이 온라인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대자보 사진은 페이스북·트위터 등을 통해 확산됐다. 이 현상의 결과는 반대 의견을 표출하는 새로운 하이브리드 소통법일 수 있다. 빠르되 예전처럼 온기가 있는 소통법 말이다. 세계 디지털 사회가 앞만 보고 달려나가고 있는 지금, 한국이 ‘펜과 종이’라는 과거로 회귀하며 더 앞서가는 사고를 전 세계에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이승윤 동북아 출신 최초 옥스퍼드유니언 학생회장. 중앙일보 객원기자로 월드포스트 한국 담당 편집자다.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 한국에 대해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를 펴냈다.



※이 글은 월드포스트에 실렸으며 중앙SUNDAY가 협의하에 전재합니다. 원문은 중앙SUNDAY 모바일 에디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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